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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21> 식민지의 해방구-천도교 중앙대교당과 서울YMCA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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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21> 식민지의 해방구-천도교 중앙대교당과 서울YMCA회관

입력
2010.06.2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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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인이 감내해야 했던 비극은 입은 있으나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고 모이고 싶으나 모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는 집회와 결사, 언론의 자유가 극도로 통제된 엄혹한 시대였지만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할 공간이 전무하지는 않았다.

서울 종로구 경운동의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종로2가의 서울YMCA 회관이 바로 그곳이었다.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각종 단체의 집회와 강연회, 문화운동이 이어졌던 그곳은 민족의 여론을 전달하는 민간 의사당 역할을 했다.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 수렴, 천도교 중앙대교당

지금은 관광객들로 왁자지껄한 인사동 동쪽 뒷골목. 고급 음식점으로 쓰이는 한 전통가옥 옆 골목길에 들어서면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자연 아끼기를 어머니의 사랑같이'라는 문구가 씌어있는 아담한 아치가 눈에 띈다. 그 너머로 반원형 창문과 바로크풍 지붕이 인상적인 붉은벽돌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1921년 2월 완공된 천도교 중앙대교당이다.

건물 동쪽에 우람하게 서 있는 높이 15층의 천도교 중앙총부 수운회관(1968년 건립)의 위압감 때문에 90년 풍상을 견뎌온 중앙대교당은 조금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건물은 그 독특한 건축양식 때문에 식민지 시기에는 명동성당, 조선총독부와 함께 서울의 3대 건축물로 꼽혔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역사는 식민지 시기 최대의 민족종교였던 천도교의 성쇠와 따로 생각할 수 없다. 요즘은 전국 교인이 10만명 정도에 불과하다지만 당시 천도교는 교인 100만명을 헤아릴 정도로 교세가 대단했다. 망국을 전후해 천도교인들의 숫자가 급증했는데 이는 동학혁명의 기억과 함께 박래품인 기독교를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지식인과 민중에게 천도교가 위안과 희망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교세 확장에 따라 종로구 송현동에 있던 천도교 본부인 중앙총부를 이전하고 교당을 건립하려는 계획은 1918년에 세워졌다. 하지만 완공까지는 4년이 걸렸다. 공사가 지체된 곡절은 이렇다. 교당 건립을 위해 전국 교인들의 모금이 이어졌으나 일제는 이 건축성금을 독립자금으로 의심해 장부를 압수하고 모금된 성금을 각 교구에 반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지역 교구들은 성금을 반납받은 것처럼 거짓 영수증을 발급하는 방법으로 일제를 속였고, 공사는 계속될 수 있었다고 한다.

완공된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1,000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는데 이곳에서는 종교 행사만큼이나 자주 시국강연회, 음악회, 동화극, 운동경기 등이 열렸다. 이곳은 특히 노동자, 여성, 사회주의자 등 사회적 약자와 혹은 일제의 집중적 감시를 받던 세력이 주로 이용하는 장소였다.

예컨대 1922년 10월 22일 열린 노동자대회는 몸값 40전과 매달 30전을 경찰에 상납해야 했던 서울시내의 지게꾼들이 운집한 성토대회장이었다. 400여명의 지게꾼이 모였는데 그 집회의 분위기를 당시의 신문기사는 이렇게 전한다.

"날마다 돈푼씩이나 벌어먹는 가련한 그 지게꾼들의 피를 빨아먹으려고 총취체(단속비)라는 명목을 마련하야, 그 지게꾼들은 힘을 다하야 버텨도 그날그날의 생활을 하야갈 수 없는 이때에 40전씩을 내이지 아니한다고 지게꾼들의 목숨을 매달아둔 지게를 압수하느니 벌이를 못하게 하느니 하야 시내에 있는 수천의 노동자의 생활 압박하는 것은 경찰의 처치가 온당치 못하며 온당치 못한 압박을 배척하자는 연설이 있었다. 다수한 노동자들은 두 눈에는 흥분에 넘치는 눈물이 가득하고 박수소리는 성내를 진동하?다…'

이밖에도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는 일본 니가타현에서 발생한 조선인 학살사건 보고연설회(1922년 9월), 인력거꾼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휴업을 결의한 서울시내 인력거조합대회(1922년 12월), 조선 최초로 자유연애를 주제로 한 신여성 권애라의 강연(1923년 1월), 백정들의 신분차별 철폐운동인 형평사 전국대회(1924년4월), 노동청년회 노동공제회 등 사회주의 단체들의 러시아혁명 기념 대강연(1924년 11월) 등이 잇따라 열려 자연스럽게 약자들의 목소리를 수렴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천도교 잡지 '개벽'의 주간을 지낸 차상찬(1887~1946) 선생의 아들 차웅렬(83)씨는 "일제말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현재 소공동 조선호텔 자리에 있었던 경성부공회당, 서울시의회로 쓰이는 경성부민회관과 함께 가장 잘 알려진 집회 장소였다"며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천도교에 대한 감시는 엄중했지만 대교당은 사회적 약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단골 집회 장소였다"고 회고했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민중은 천도교가 종교이자 대안의 정치체이기를 희구했다"며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명동성당 같은 일종의 해방구 역할을 했다"고 부연했다.

밀실 속의 광장, 서울 YMCA회관

서울 종로2가에 위치한 서울YMCA회관은 '대한중앙기독교청년회관'이라는 이름으로 1908년 12월 완공됐다. 강당, 운동실, 교실, 도서실, 공업실습실 등을 갖춘 3층짜리 회관이 종로 한복판에 세워지자 매천 황현은 "그 집의 높기가 산과 같고, 종현의 천주교당(명동성당)과 함께 남과 북에 우뚝 마주서서 장안의 제일 큰 집이 되었다"고 말했다 한다.

이곳은 한편으로는 외국어와 직업교육, 스포츠 보급 등 청년문화운동의 요람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중요한 강연회, 연설회 등이 열린 공론의 공간이기도 했다. 최남선의 회고에 따르면 이상재, 안창호, 윤치호 등 국내명사는 물론이고 비행가 오빌 라이트, 미국 민주당의 거물 정치인 W J 브라이언 등 서양의 명사들도 이곳에서 강연을 했다.

2004년 발간된 는 식민지 시기의 YMCA를 "만남의 광장이요, 동서 교류의 현장이요, 토론과 논단의 장소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1927년 2월 최초의 좌우합작운동이었던 신간회 창립대회가 열린 곳도 서울YMCA회관이다.

1908년에 세워진 서울YMCA회관은 한국전쟁 때 소실됐고 현재 건물은 1967년 같은 자리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영친왕이 직접 썼다는 '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學館(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과 '一千九百七年'으로 기공 연도를 적은 초석만이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신종원 서울YMCA 시민사회개발부장은 "우파 기독교 인사만 이용했을 것이라는 오해와 달리 이 회관은 사회주의자, 가톨릭 인사 등 다양한 세력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며 "식민권력은 식민지인들에게 '광장'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서울YMCA회관은 다양한 집회와 토론이 열렸던 밀실 속의 광장이었다"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 일제시대 조선인들 시위는…

일제강점기에 독립, 자치 등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조선인들의 시위는 철저히 억압됐다. 조선총독부의 기본적인 통치정책은 한 마디로 '질서 유지'였다. 그렇다면 모든 종류의 시위가 금지됐던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식민지 시기에도 상수도 부설, 전기료 인하, 도청 이전 반대, 전차요금 인하 등 민원과 관련된 문제에는 격렬한 반대운동이나 시위가 뒤따랐다.

1920~30년대 서울에서 전개된 상수도 설치운동의 경우 1920년 서울에 창궐했던 콜레라가 원인이 됐다. 1910년 전후만해도 상수도 이용자의 대다수는 일본인이고 조선인들은 우물과 하천수를 이용하고 있었으나 콜레라 창궐 이후 '우물은 야만의 표상, 상수도는 근대의 표상'이라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경성부를 상대로 1920년 내내 수돗물을 달라고 요구하며 집단행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지역 유지를 중심으로 행정당국에 진정을 넣거나 주민들이 연명서를 제출하는 형태였다.

현재의 청량리, 왕십리, 마포 지역 주민들이 1932~33년 벌였던 교외선(전차) 폐지운동도 지역민원 시위의 전형적 형태였다. 전차 운영회사였던 경성전기가 당시 이 지역의 전차 노선을 폐선하고 버스로 대체하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이 지역 주민들은 선전지와 포스터 배포, 주민대회 개최 등으로 반대운동을 펼쳤다.

1930년대초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을 신생 도시 대전으로 이전하려는 조선총독부의 계획도 2년여 계속된 공주 지역 주민들의 반대운동에 부딪쳤다.

이같은 시위는 대개 교통ㆍ수도ㆍ전기 등 공공재의 배분에 있어 기본적 시민권이 박탈된 조선인에 대한 차별에 근거한 것이었고 민족운동적 성격을 띠기도 했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공공재 배분에 관한 조선인들의 시위에 공공성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 '식민지 공공성'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왕구기자

■ "1980년대 명동성당처럼 빼앗긴 자들의 아픔을 대변했던 곳"

서울 종로의 중앙YMCA회관과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식민지 시기에 공론 형성의 마당으로 각광받았던 곳들이었다.

1908년 12월 신축된 종로 YMCA회관은 식민지 시기 조선인의 거리 종로의 랜드마크였다. 특히 500~600명을 수용하는 2층의 대강당은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천도교기념관이 생기기 전까지 민간의 유일한 공회당이었다.

때문에 사회단체에서 주최하는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가 이곳에서 열렸고, 조선학생회와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 같은 유력 단체들의 창립대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민족협동전선으로 출범한 신간회 또한 창립대회와 해소대회를 이곳에서 열어 그 시작과 끝을 함께 하였다. 당시 YMCA 강당의 임대료는 35원 정도였는데, 토론회나 강연회의 경우 보통 20~40전의 입장료를 받았다. 이렇게 입장권을 사야 하는데도 만원을 이루는 때가 적지 않았다고 하니, 식민지 조선인의 억눌린 정치ㆍ사회적 욕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1921년 2월에 준공되었다. 건평 212평에 최대 수용인원이 1,000명에 이르렀다. 대교당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이 건물은 당초 교단의 종교행사와 천도교청년회, 천도교소년회, 조선농민사 같은 천도교계 사회단체의 집회를 위해 마련되었다.

그러나 조선물산장려회가 1923년 설날을 맞아 물산장려 대강연회를 개최한 것을 비롯해 사회단체의 각종 집회 또한 수시로 열렸다. 천도교에서는 1924년 수운 최제우 출생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상하층 좌석에 1,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천도교기념관을 중앙총부 구내 동남편에 건립하여 이듬해 1월부터 일반에 무료로 개방하기도 하였다.

이들 공회당 말고도 식민지 시기 서울에는 1920년 현 소공동에 경성상업회의소 회관을 겸해 지어진 경성공회당(한화빌딩 자리)과 1935년 태평로에 들어선 부립극장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본관)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건물의 주된 수혜자는 서울에 사는 일본인들이었다. 조선인에게 허용된 것은 각종 명창대회나 몇몇 관변 집회가 고작이었다.

때문에 조선인의 입장에서 규모나 시설 면에서 다소 떨어질지라도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YMCA회관과 천도교당에 각별한 애착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23년 1월 요리점 국일관에서 열린 사회 유지들의 신년 간친회장에 청년 6~7명이 달려들어 "모임 장소로 청년회관도 있고 천도교당도 있는데 왜 하필 음녀 탕부가 모여 노는 요릿집이냐"고 일갈한 대목에서 그 절절함을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이 YMCA회관과 천도교당은 1980년대의 명동성당처럼 억눌리고 빼앗긴 자들의 아픔을 대변하며 비극의 역사와 숨결을 같이해온 소중한 민의의 전당이었다.

장규식ㆍ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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