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소외된 어린이들을 도우며 산 김석산 어린이재단 회장이 20일 오후 9시 서울 혜화동 서울대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9세.
1941년 일본 규슈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45년 광복과 함께 가족과 귀국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을 여의고 대전의 아동 복지 시설인 천양원에서 생활한 고아 출신이다. 천양원을 후원한 미국 기독교아동복리회(CCFㆍ어린이재단 전신)의 도움으로 대학(경희대 영문과)까지 마친 그는 “나처럼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평생을 살겠다”며 63년 CCF에 번역사로 입사했다.
천양원이라는 아동보호시설에서 전쟁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며 해외 후원자와 국내 수혜자간 서신 번역 등 가교 역할을 했던 김 회장은 CCF가 철수를 결정한 76년부터 그는 독자적인 기관 설립을 추진, 79년 ‘어린이 재단’을 출범시키며 무교동 현 재단 빌딩에 터를 잡았다. 그 후 지금껏 그는 소외 아동 돕기에 자신의 온 열정을 쏟았다.
그가 외국인 대신 국민들을 소외 아동 후원자로 모집하는 ‘불우아동 결연사업’을 진행한 덕분에 재단은 CCF 철수(86년) 후에도 자력으로 국내아동을 돕는 민간기관으로 자립할 수 있었다. 김 회장은 서울시의 불우아동 결연사업 위탁운영(81년)은 물론 정부의 독거노인, 장애인 등 소외계층과 후원자 간 1대1로 연결해주는 ‘불우이웃 결연사업’(92년)까지 맡아 약 40만 명에게 도움을 주는 메신저 역할을 했다. 95년 그가 회장을 맡으면서 재단은 해외로도 눈을 돌려 현재 전 세계 어린이 1만1,000여명에게 매년 약 20억 원을 후원하고 있다.
김 회장은 특히 아동학대에 대한 인식조차 흐릿했던 89년부터 아동학대 문제를 이슈화하며 사회의 관심을 촉구했고, 2000년 아동학대 예방 및 처벌근거, 상담신고 의무화 등을 명문화한 개정 ‘아동복지법’을 현실화했다. 86년 재단 내 어린이 찾아주기 종합센터를 개설해 8,300여명의 어린이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 보내기도 했다. 47년간 소외된 아이들의 아버지로 살며 빈곤아동 152만명의 자립을 도운 김 회장은 지난해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재단 관계자는 “고인이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배움의 기회를 얻었고, 그 분들이 보내 준 격려의 글로 용기를 얻었다. 낳아준 부모님뿐 아니라 후원자들도 내 부모다. 아이들을 위해 평생 사회복지의 외길을 걷게 된 것은 내 운명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고 전했다. 98년부터 본부에서 근무한 이광문 해외사업 본부장은 “자식이 없었던 회장님은 소외 당한 아이들을 모두 자신의 자식으로 여기고, 어려움에 처한 아동이 있는 곳이라면 지구촌 어디라도 달려간 열정적인 분이셨다”고 추모했다.
유족으로 부인 이종숙(63ㆍ번동3단지종합사회복지관 관장)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 23일 오전 9시. (02)2072-2011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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