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가 과거 정권이 자행한 반인륜 범죄에 대한 국가 책임을 폭 넓게 인정하고 있다. 특히 상급심에서 그 책임을 더 넓게 인정하는 추세다. 국가소송을 대리하는 법무부는 배상시효가 지났다며 상소하지만, 도리어 배상액이 늘어난 판결문을 받고 있다.
서울고법 민사12부(부장 박형남)는 간첩 멍에를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조기잡이 어부' 서창덕(64)씨와 가족이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13억여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고 20일 밝혔다. 서씨의 배상액은 1심에서보다 1억5,000만원 늘었다.
재판부는 "긴 세월 동안 서씨의 삶이 파괴되었지만, 고문을 자행한 군수사관들은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는 등 그의 원한과 울분을 풀 기회는 부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이 소송은 한 시민의 충성심을 의심하면서 고문을 저지른 국가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고, 서씨가 자존심을 갖고 생활하며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마지막 절차"라며 위자료를 증액했다.
서씨는 1967년 서해에서 조기잡이를 하던 중 북한 경비정에 피랍돼 124일만에 귀환했지만, 2년 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그러나 17년이 지난 84년, 전두환 정권은 고정간첩이란 죄목을 씌워 서씨를 다시 체포했다. 당시 보안사는 물고문과 쇠몽둥이 구타로 서씨한테서 허위자백을 받아냈고, 법원은 그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이로 인해 서씨는 가정이 파탄 난 것은 물론, 출소한 뒤에도 간첩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5년 전까지 보안관찰을 받아왔다.
서씨 사건처럼 항소심이 국가가 주도한 범죄에 대해 배상 책임을 확대한 판결이 최근 잇따르고 있다. 지난 3월 서울고법은 전두환 정권이 조작한 대표적 공안사건인 '아람회 사건' 피해자 37명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고문에 따른 후유증을 추가로 인정, 원심보다 20여억원 늘어난 206억여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또 한달 뒤 같은 법원은 79년 군대에서 상관이 쏜 총에 맞고 사망했지만 자살로 은폐된 심모씨의 유족이 낸 소송에서 1심보다 1억4,000만원 많은 2억8,0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부장판사 출신인 한 변호사는 "사법부의 자기 반성적 측면도 있지만, 국가가 자행한 반인권 범죄 피해자에게 금전적으로나마 충분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사법부 내에 자리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권지윤기자 legend8169@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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