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대륙 끌어안은 감성 경영… 남아공에 '전자 한류' 삼성 열풍
"3차원(3D) TV로 월드컵을 보고 싶은데, 추천할 만한 제품이 있습니까? 직접 제가 TV 화질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휴대폰은 어떻죠?"
지난 달 말 지구촌 축제인 월드컵을 준비중이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대형 종합 전자상가 다이온 와이어드. 조지 크리스(30)는 매장에 들어서자 마자, 여러 가지 제품을 한꺼번에 구입하려는 듯, 점원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이 고객 질문에 답을 마친 점원 레보 컨스탄스(32)는 "예전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제품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찾아오는 젊은 흑인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며 "특히, 구매력을 갖춘 20~30대 중반 층에게 삼성 제품의 인기는 좋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삼성전자가 검은 대륙인 남아공에서 '흑심(黑心)'을 훔치고 있다.
이른바 '블랙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신 소비층의 마음을 사로 잡으며 신시장 창출에 박차를 가하고 나선 것. 블랙 다이아몬드는 남아공에서 만델라 대통령 집권(1994년) 이후, 흑인 우대 정책과 더불어 형성된 소비성 강한 신흥 중산층을 말한다. 삼성전자는 이 곳에서 흑인들을 끌어 안으며 시장개척에 여념이 없다.
문화적 이질감이 가장 큰 걸림돌
삼성전자의 남아공 판매 법인 진출 역사는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으레 개척자는 가시밭길을 가듯, 삼성전자가 불모지나 다름 없던 이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닦는 데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오는 이질감은 현지 법인 안착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야근 참여율이 제로였던 것은 물론이고, 급여 등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업체에서 입사 제의가 들어오면 단 며칠 만에 모두 미련 없이 현 직장을 떠나갔다. "처음에 아프리카에선 기본적으로 조직 관리라는 게 제대로 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곳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처음에 겪는 일이지요. 도무지 (현지인들의 마음을) 종 잡을 수가 없거든요."
앙골라 삼성전자 판매지점 책임자인 정동표(41) 차장은 남아공 진출 초창기 선배들이 겪었던 경험을 똑같이 현재 자신의 근무지에서 겪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피부색이 다른 동양인에겐 비즈니스에 필요한 행정 절차상의 복잡한 서류까지 한 두 번에 해결되는 법도 없었다. 이방인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텃세'와 차별이 예상보다 심했던 것이다. 아프리카 블루오션 창출의 전진기지로 삼으려고 했던 삼성전자의 남아공 개척기는 그렇게 초반부터 꼬여갔다.
해법은 철저한 현지 밀착형 감성 경영
하지만 언제까지 문화적 차이만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 끝에 삼성전자가 뽑아 든 카드는 '현지 밀착형 감성 경영'. 빈민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취업 교육에서부터 창업까지 지원해 주는 '삼성리얼드림프로젝트'가 대표 사례다.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저에게도 컴퓨터(PC) 소프트웨어 개발자란 꿈이 생겼거든요."
남아공 케이프 타운에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수강생 브이사 모그워치(21)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처럼 즐거워했다.얼마전까지만 해도 빈민가를 떠돌았던 그에겐 이 프로젝트가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던 셈이었다. 삼성전자가 2008년10월부터 남아공과 이집트, 케냐, 나이지리아 등에서 진행 중인 이 프로젝트의 수혜자는 올해 연말까지 총 4,500여명에 달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여기에 남아공 현지 축구 대회 등을 공식 후원하면서 브랜드 인지도를 향상시켜 나갔고, 이내 판매실적 향상이란 결실을 얻어냈다. 시장조사기관인 디스플레이서치에 따르면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 액정화면(LCD) TV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남아공 지역 선전에 힘입어 지난 3년간 평균 40%에 근접하는 점유율로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삼성 애니콜 휴대폰의 현지 시장 점유율도 2006년 14.6%에서 2009년에는 32.4%로 두 배 이상 뛰어 오르며 40%대인 노키아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박광기 삼성전자 남아공 법인장은 "치안 문제 등으로 외부 세계에 보여지는 남아공의 성장 잠재력은 상당히 평가 절하된 부분이 많다"며 "남아공의 발전 가능성을 최대한 현실화 시키면서 이 곳에서도 전자 한류 바람을 일으켜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요하네스버그ㆍ케이프타운(남아공)=허재경기자 ricky@hk.co.kr
■ 남아공은 어떤 나라…지하자원 풍부… 아프라카 경제성장 주도
남아공은 아프리카 전체 대륙의 경제 성장을 주도하는 나라다. 2009년말 기준, 전체 아프리카 대륙의 국내총생산(GDP)의 약 25%에 달하는 2,872억달러를 남아공이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4,932만명의 인구가 모여 사는 이 곳의 가장 큰 장점은 122만㎢(남한 12.2배)에 이르는 넓은 토지 밑에 감춰진 풍부한 지하 자원. 이 나라 수출 1위 품목은 백금이, 2위는 금이 차지하고 있으며 망간과 크롬 생산도 각각 세계 1위다. 여기에 다이아몬드는 세계 4위, 석탄은 5위 생산국이다.
그만큼 경제적 발전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연 5%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사실을 방증한다. 선진국들이 앞다퉈 남아공에 진출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아공에는 또 '흑인경제우대'(Black Economic Empowerment)란 제도가 있다. 백인 소유의 기업이 적용 대상으로, 흑인의 주식 소유 비율과 흑인의 중역 비중 등을 평가해 좋은 점수를 받은 기업에 정부 계약의 우선권을 주는 제도다. 이 제도 덕분에 백인 보다 씀씀이가 커서 '블랙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약 200만명 가량의 신흥 흑인 중산층도 생겨났다.
오랜 세월 동안 이뤄진 불평등과 부패, 착취 등으로 치안이 불안하고 실업률(25%)이 높은 게 단점으로 지적되지만 그 만큼 비즈니스 기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김용석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중동ㆍ아프리카 팀장은 "개발도상국에서 나타나는 안전 등 일부 불안한 요소가 있지만 풍부한 지하자원과 소비성 강한 흑인들이 향후 경제 주체 세력으로 등장할 것을 감안한다면 남아공은 매력적인 시장"이라고 설명했다.
허재경기자
■ 현지화 전략 성공한 대한전선
제3세계 시장으로 꼽히는 남아공에 한 발 앞서 진출, 이미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국내 중소 기업도 있다.
남아공을 포함해 아프리카 전체 대륙의 취약한 전력 인프라를 보고 2000년 현지 업체와 합작방식으로 설립한 대한전선이 주인공이다. 대한전선은 광통신케이블과 각종 전력용 전선을 생산 및 공급하며 남아공 현지 2위권의 종합전선기업으로 성장한 업체다. 설립 이후 연 평균 20%대의 성장세를 유지하며 2007년에는 2억 달러 규모의 매출을 올렸고 2008년에는 글로벌 경제 위기 속에서도 2억5,000만달러의 매출 실적을 달성했다. 지난 해엔 세계적인 경기 침체 영향으로 매출이 다소 줄었지만 올해는 2억6,000만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대한전선이 현지에서 외국 중소 기업으로, 이런 짧은 기간 동안 두드러진 성과를 올린 비결은 뭘까. "주인의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회사와 종업원이 한 몸이란 인식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거든요. 걸핏하면 이직을 하는 이 곳 사람들의 마음을 다잡고 업무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선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하준영 대한전선 남아공 법인장은 현지 종업원들과 나눈 책임감 공유를 회사 성장의 원동력으로 제시했다. IMF 위기 및 경기 불황 등 외적 요인 극복에 앞서, 현지 종업원들과 교감한 내적 소통을 대한전선 남아공 법인의 성공적인 안착 요소로 꼽은 것이다. 공장장을 현지인으로 뽑고, 주기적인 사내 체육대회 및 공장 근로자들과 함께 하는 월단위 단합대회 등이 대한전선의 주요 행사로 진행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 법인장은 "앞으로도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바탕으로 대한전선 남아공 법인을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향한 전초기지로 키워내겠다"고 강조했다.
허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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