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처음 맛본 햄버거는 한 마디로 세상에서 제일 맛난 음식이었다. 햄버거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는 어머니가 해주는 밥 말고 다른 걸 먹어보고 싶은 어린 입맛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패스트푸드는 건강을 해치는 공공의 적이 돼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그 자리를 버거의 고급화를 내세운 '프리미엄 버거'가 채워가는 중이다. 프리미엄 버거, 보통내기 아니다. 질과 양 모두 기존 브랜드 버거랑은 비교가 안 된다.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손수 만드는 수제버거에서 출발한 프리미엄 버거 시장은 좋은 빵과 고기, 싱싱한 채소, 정성스런 레시피를 기본으로 더욱 다양해지는 추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소비자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진하고 묵직한 서양식 버거
'버거=패스트푸드'란 공식이 본격적으로 깨지기 시작한 건 프리미엄 버거 전문점 크라제가 1998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문을 열고서부터다. 미리 만들어둔 버거를 그저 꺼내주기만 하는 패스트푸드점과 달리, 주문 받고 그 자리에서 바로 만들어주는 수제버거는 버거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버거도 '슬로우푸드'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대 초 프리미엄 버거의 새로운 진원지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이 떠올랐다. 파란 눈 까만피부의 이웃이 낯설지 않은 이 동네에선 '진짜 미국식'을 표방하는 버거 역시 그리 어색하지 않다. 2005년 이태원에 처음 문을 연 '스모키살룬'은 미국식 버거 문화를 이끈 대표주자다.
스모키살룬에서 버거를 주문하면 일단 푸짐한 양에 놀란다. 고기(패티) 두께가 족히 2cm는 넘는다. 두툼한 빵(번) 사이에 채소와 치즈에다 계란프라이까지 들어간 버거는 높이가 작은 손 한 뼘은 돼 보인다. 콜라를 시키면 잔이 아니라 병째 빨대를 꽂아 내온다.
이곳을 포함해 진짜 미국식이라고 자부하는 프리미엄 버거의 공통적인 특징은 뒷맛이 오래 간다는 점. 점심에 먹으면 저녁까지 입안에서 맴돈다. 조리방식 때문일까. 조 데이비드 현 스모키살룬 대표는 "보통 버거 패티는 소금 후추 정도로 간단히 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우리는 양념을 많이 넣고, 약한 불에 구우면 탄력이 줄고 맛이 밍밍하기 때문에 센 불에 확 구워낸다"고 설명했다. 또 패티를 구울 때는 표면을 살짝 태운다. 미국식 바비큐처럼 말이다. 육즙을 보호하는 비결이다. 번도 패티와 함께 살짝 굽는다. 패티에서 나오는 기름이 맛깔스런 토스트 효과를 낸다.
스모키살룬의 버거는 맛과 향이 진하고 묵직하다. 패스트푸드 버거에 입맛이 길들여져 있는 한국인에겐 아직 이런 서양식 버거가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조 대표는 "한국에선 버거를 간식거리로 생각하는데, 우리 버거는 한끼 개념으로 만드니 하나 먹고도 든든하다"고 말했다. 주문을 받고 그 자리에서 만들기 때문에 좀 기다려야 하는 단점은 감수해야 한다.
젊은 감각과 한국의 맛 가미
쿠바나 멕시코의 길거리 벽화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는 스모키살룬에 갔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프레쉬버거에 들어서면 같은 버거집인데 어찌 이리 다를까 싶다. 2000년대 후반 들어 이태원을 벗어나 압구정동 새로수길과 서교동 홍대 앞 등으로 흩어지기 시작한 프리미엄 버거집들은 최근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가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가격과 분위기다. 프리미엄 버거는 보통 7,000∼13,000원선. 하지만 프레쉬버거는 4,000∼5,000원대로 초기 프리미엄 버거보단 싸고 패스트푸드보단 비싸다. 초기 프리미엄 버거집이 주로 미국식 펍 분위기를 연출한데 비해 프레쉬버거를 비롯해 최근 문을 연 곳들은 세련되고 깔끔한 인테리어로 카페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조리방법에선 참살이 요소가 가미됐다. 프레쉬버거 모든 메뉴에 쓰이는 번은 건강에 좋다는 단호박번과 오징어먹물번이다. 느끼하거나 질기게 느껴질 미국식 패티 대신 한국인에게 익숙한 질감을 내려는 시도도 눈에 띤다. 정수연 프레쉬버거 대표는 "패티에 양파를 넣어 부드럽게 씹히게 하고 열량도 낮췄으며, 버거용 치즈도 매장에서 직접 체다 고다 모차렐라 치즈를 화이트와인과 함께 섞어 매일 만든다"고 말했다.
육류 말고 생선으로 만든 패티도 쓰고, 느타리버섯과 청양고추 등 웰빙 한식 재료도 넣고, 한우로 패티를 만드는 등 버거집마다 재료와 조리법도 점점 차별화하고 있다. 정 대표는 "미국이나 동남아시아의 버거 소비자가 가족 단위라면 한국에선 10∼30대 젊은층"이라며 "버거 문화를 정착시키려면 젊은층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다양하게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말했다.
버거라면 그래도 버거답게
아무리 프리미엄이라도 버거는 어찌 됐든 버거다워야 한다는 고집도 있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서울파이낸스센터 지하에 지난해 문을 연 W버거는 버거에서 거품을 빼자는 게 모토다. 미국식 버거를 먹으며 데이트라도 할라 치면 여성들이 나이프 잡고 포크 드는 광경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자체 개발했다는 각종 고급 소스 덕에 오르는 버거 가격도 만만찮다.
강석훈 W버거 대표는 "사실 버거는 본래 간단히, 빨리 먹을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이라며 "레스토랑처럼 폼 잡는 분위기와 높은 가격이란 거품을 빼고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리미엄 버거집에선 대부분 앉아서 주문하지만 W버거는 셀프서비스다. 음료는 무한 리필. 손으로 들고 한 입에 베어 먹을 수 있는 크기이고, 프리미엄 버거로서는 중간대 가격이다.
대신 W버거에선 호주산 와규를 참숯 그릴에서 구워 패티를 만든다. 부드럽고 육질이 풍부한 와규는 서양에서도 품질 좋은 쇠고기로 손꼽힌다. 철판에서 굽는 보통 패티보다 숯 향이 배고 육즙도 잘 머금어 고기 맛이 한결 산다. 결국 '패스트푸드'의 좋은 측면은 살리고 나쁜 측면은 개선한다는 취지다.
패스트푸드 버거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그 뒤를 이은 프리미엄 버거 시장은 그야말로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진하고 묵직한 서양식 버거냐, 트렌디하고 한국적인 버거냐, 패스트푸드의 강점을 고수하는 버거냐, 누가 시장을 석권할지 아직 판세는 드러나지 않았다. 흥미진진하다.
임소형기자
■ 양송이 수프·어니언링·샐러드 "버거랑 친해요"
사이드디쉬도 가만 있을 순 없다. 패스트푸드 버거에 딸려 나오는 기름진 프렌치프라이는 저리 가라다. 프리미엄화에 발맞춘 사이드디쉬 면면이 화려하다.
우선 수프와 샐러드. 버거와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부드러운 양송이 수프와 아삭아삭 씹히는 채소는 버거를 균형 잡힌 한 끼 식사로 만드는데 한몫 한다. 프리미엄 버거집에서 최근 가장 많이 등장한 사이드디쉬는 바로 어니언링. 양파를 갈아 고리 모양으로 빚고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살짝 튀겨내면 프렌치프라이에 질린 입맛에 신선한 느낌마저 선사한다.
프렌치프라이도 요즘은 으깬 감자에 녹말가루 약간 섞어 막대 모양으로 냉동시켜 튀기는 예전 방식으로만 만들지 않는다. 생감자를 부채꼴로 숭덩숭덩 썰어 정성 들여 두 번 튀겨내기도 한다. 처음엔 3분 정도 살짝, 다음엔 5∼6분 정도 익혀야 타지 않고 속까지 잘 익는다. 약간 퍼석퍼석하지만 냉동감자와는 분명 다른 맛이다.
콜라 사이다 말고 맥주와 생과일주스도 버거와 궁합 괜찮다. 날이 더워지니 사이드디쉬로 팥빙수까지 등장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 "버거에 질쏘냐" 피자·치킨도 이미지 대변신
패스트푸드 하면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피자랑 치킨이다. 패스트푸드에서 프리미엄으로 부지런히 탈바꿈하는 버거에 뒤질 새라 피자와 치킨도 이미지 변신에 나섰다. 이들 업계의 프리미엄화 흐름은 한 마디로 얼마나 더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레시피를 적용하느냐의 아이디어 싸움이다.
손잡이가 이색 별미로
1990년대 후반 피자는 역사상 가장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 들고 먹는 손잡이로 쓰고 먹다 남기기 일쑤였던 도우 가장자리가 달라진 것. 손잡이의 운명은 피자헛이 도입한 치즈 크러스트 피자 덕분에 180도 바뀌었다. 가장자리 안에 치즈를 넣어 밋밋한 빵 맛이 아니라 부드럽고 촉촉한 식감을 느낄 수 있게 됐다.
이후 피자업계는 아예 도우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두꺼우면서 담백한 오리지널 피자 도우는 미국식, 얇으면서 바삭한 씬 도우는 이탈리아 로마식이다. 도미노피자는 최근 나폴리 도우를 출시했다. 도미노피자 관계자는 "나폴리 도우는 48시간 냉장 숙성시킨 도우를 손으로 얇게 펴 가장자리 두께는 1.5cm, 가운데는 0.3cm 정도로 만든다"고 설명했다. 한 피자에서 오리지널 도우와 씬 도우를 함께 맛볼 수 있어 이채롭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쫄깃한 식감도 도우에 가미됐다. 피자헛은 생(生)효모로 자연발효시켜 공기층이 풍부해 부드러우면서도 촉촉하고 쫄깃한 찰 도우를 개발했다. 찰 도우로 만든 '더 스페셜' 피자는 다른 피자보다 기름기가 적고 맛도 담백하다.
그래도 피자 하면 토핑이다. 1990년대 초 피자에 햄이나 소시지 대신 감자를 올리기 시작한 뒤부터 토핑의 과감한 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03년 도미노피자는 원료 단가가 높아 대부분의 피자 업체가 사용하기를 꺼리던 가리비와 새우 같은 해산물을 토핑에 처음 도입했다. 2007년부턴 태국풍 카레나 독일식 수제소시지, 스페인 페리페리고추 등 아예 다른 나라의 전통 식재료나 조리기법을 피자에 가져다 담으며 '요리 피자' 개념을 도입했다.
치즈도 더 신경 쓴다. 파파존스 피자 관계자는 "인공합성치즈나 녹말을 섞어 잘 늘어나는 일반 피자치즈와 달리 깊고 부드럽고 풍부한 순수 천연치즈를 쓴다"고 말했다. 파파존스 피자는 지난해부터 와인을 함께 판매하고 있다. 와인과 잘 어울릴 만큼 피자에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사용했음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마늘닭 호박닭 파닭
이름 없는 동네 호프집이나 닭집에서 파는 치킨 말고 브랜드 치킨이 등장했어도 얼마 전까진 주문하는 모습에 별 변화가 없었다. "프라이드 양념 반반에 무 많이요" 하면 대충 원하는 치킨이 나왔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만 300여개. 치킨 업계 내부의 경쟁도 치열해진 데다 버거와 피자의 변신까지 겹치며 변화가 절실해졌다.
그 결과 치킨 주문, 까다로워졌다. 달작지근한 양념 말고 브랜드마다 개성 있는 독자적 양념으로 새로운 맛을 시도하며 메뉴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BBQ의 매운양념치킨과 또래오래의 핫양념치킨 등은 입안을 화끈하게 하는 매운 맛으로 치킨의 느끼함을 부담스러워 하는 고객까지 끌어들인다. 페리카나의 분말시즈닝치킨과 네네치킨의 스노윙치킨처럼 양념을 소스 형태가 아니라 가루로 뿌리는 메뉴도 나왔다.
최근에는 마늘과 호박 파 등 아예 다른 식재료와의 조합을 꾀하며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프라이드 치킨 위에 얇게 썬 파를 얹고 겨자 소스를 뿌린 네네치킨의 오리엔탈 파닭은 출시 6개월 만에 100만 마리가 팔렸을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 초조해진 브랜드 버거, 맛·메뉴·분위기 '업그레이드'
프리미엄 버거 시장이 강세를 보이면서 기존 패스트푸드 브랜드 버거 업계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프리미엄 버거의 맛과 서비스를 경험한 소비자들은 브랜드 버거에 대한 기대치도 점점 높여갔다.
하지만 빠르게, 싸게 먹는다는 패스트푸드만의 보편성을 지키면서 프리미엄 버거를 따라잡기 위한 고급화 전략을 함께 구사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브랜드 버거가 시도하고 있는 공통적인 전략은 크게 3가지.
먼저 고품질 재료를 사용한 웰빙 메뉴 개발이다. 롯데리아는 한우를 사용한 불고기버거와 스테이크버거를 내놓았다. 번과 패티 사이에 들어가는 채소도 양상추 토마토 외에 브로콜리와 양송이를 추가하며 웰빙화를 시도했다. 버거킹은 수제버거를 연상케 하는 갈릭스테이크하우스버거를 야심작으로 내놓았다.
두툼한 직화구이 패티와 달콤하게 구운 양파, 매콤한 갈릭소스가 푸짐하게 들어가 한층 고급스러워졌다. KFC에선 담백하고 부드러운 에그타르트와 고구마타르트가 사이드디쉬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음료나 디저트 메뉴도 달라졌다. 출출할 때 간식거리로 즐길만한 아이스크림과 브라우니, 팥빙수를 내놓아 소비자의 선택 폭을 넓힌다는 전략이다. 커피도 고급 원두를 쓴다. 덕분에 티타임에 커피전문점이 아닌 패스트푸드점을 찾는 소비자도 생겼다. 롯데리아의 와플 출시, 맥도날드의 맥카페 운영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두 번째 공통 전략은 새로운 서비스. 대표적인 게 아침메뉴다. 맥도날드의 맥모닝과 롯데리아의 조식콤보, 버거킹의 크라상이 바로 아침시간을 공략하기 위한 서비스다.
전에는 버거가 주로 점심 시간대에 애용됐지만 아침메뉴가 등장한 뒤부턴 오전 시간대 직장인의 발길도 잦아지고 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버거킹의 'Have it your way' 캠페인은 특히 고객들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버거를 주문할 때 채소나 소스 등을 고객이 원하는 대로 가감해주는 특별한 서비스다.
매장 분위기 전환도 눈에 띠는 공통 전략이다. 예전 패스트푸드 매장이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빨리 먹고 나가고 싶은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젊은이들의 감각에 맞춰 세련되고 오래 머물고 싶은 분위기로 변모하고 있다.
버거킹 관계자는 "매장 인테리어를 전보다 고급스럽게 바꾼 덕에 매장을 찾는 고객들의 연령층이 더욱 다양화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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