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홀몸으로 4형제를 키워낸 어머니는 많이 우셨다. 국가대표 유도선수로 각종 국제대회에서 따낸 금메달만 30여개,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엔 대통령 체육훈장까지 받은 자랑스러운 셋째 아들이었다. 그토록 원했던 올림픽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언젠가 지도자의 길을 걷고 교수님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던 아들이 오지랖만 넓은 '보험아줌마'들과 한가지가 되다니. 하지만 아들의 결심은 확고했다. 약속된 뻔한 길 대신 낯설지만 흥미로운 세상 속으로 그는 훌쩍 번지점프를 했다.
낯선 세계로 번지점프
양종옥(46)씨는 라이프플래너다. 우리 말로는 보험설계사로 불리는 이 직업에는 아직도 편견이 따라 붙는다. 안면을 이용해 가입을 권하고 월급날 곗돈 떼듯 꼬박꼬박 돈을 떼가면서 막상 보험금을 탈 때면 쥐꼬리만한 돈을 쥐어준다는 식이다. 하지만 양씨의 생각은 다르다. 보험, 특히 생명보험이나 종신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가족을 위한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그런 마음을 살뜰하게 받드는 것이 라이프플래너의 사명이다.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한 뒤 7년간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흔들리던 양씨가 보험의 세계에 뛰어든 배경이다.
"엘리트 체육의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유도에 모든 열정을 바쳤지만 막상 현역에서 은퇴하고 나면 선수들 중 10%만이 지도자의 길을 가고 나머지는 정말 대안이 없어요. 내가 가진 잠재력을 한번 시험해봐야겠다고 결심했지요."
현역 은퇴 후 소속사였던 쌍용양회 레미콘영업부 판매사원으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99년 보험업의 문을 두드렸다. 35세. 적지 않은 나이였다. 하지만 무사통과할 줄 알았던 최종면접에서 "평생 운동만 한 사람이 금융에 대해 뭘 아느냐"는 면박만 들었다. 오기가 발동했다. "국가대표 유도선수로 뛰면서 이탈리아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안 가본 나라 없고 그런 경험 통해 세계 각국의 문화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갖췄다.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에 이보다 더한 소양이 어디 있느냐"고 반박했다.
어렵게 입사관문 통과
입사 관문을 통과했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새벽 6시면 어김없이 회사에 출근해 보험료율 산정방식과 각종 보험관련 세제, 투자상품 등을 공부했다.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제2의 인생은 없다고 하루에도 몇 십 번씩 곱씹었다.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지도 깨달았다. 보험 가입 예정자가 계약을 할 듯 새벽 2시까지 사람을 붙잡아 놓고도 "다음에 보자"며 자리를 뜨는 일도 다반사. 보험상담을 할라치면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타났다. 국가대표였던 사람이 이런 일을 하느냐며 혀를 차거나 운동선수 출신이 뭘 알랴 싶어 처음부터 얕잡아 보거나. 어느 쪽도 상처가 됐다.
"처음엔 내 집처럼 드나들던 태릉선수촌에도 못 들어가겠대요. 운동선수들이 처음 1, 2년은 보험 해도 롱런하기는 힘들다더니 참 힘든 시기였어요. 그럴 때마다 아내와 아이들 얼굴을 떠올리며 국가대표는 달라야한다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양씨의 부인은 국가대표 탁구선수였던 홍차옥씨로 둘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운동선수 출신 못미더워하는 사람들에겐 "제가 유도 6단에 국가대표 선수였습니다. 얼마나 든든합니까"라며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했다. 종신보험 가입을 망설이는 사람에게는 "가족은 가장 힘들고 슬픈 시기에 알게 되는 당신의 간절한 사랑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상대의 처지를 깊이 헤아리는 자세는 곧 실적으로 돌아왔다. 양씨는 보험업 진출 1년여만인 2001년 보험설계사의 명예의 전당이라 불리는 MDRT(Million Dollar Round Table) 멤버에 올랐으며, 올해까지 9회 MDRT자격을 획득했다. MDRT는 전체 보험설계사 중 상위 1%에 해당하는 고소득설계사를 뜻한다.
양씨는 "유도 지도자가 됐다면 삶이 너무 단순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살아갈수록 돈 많다고 풍요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돈보다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것, 자신의 갖고 있는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훨씬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죠. 이 일을 하며 만난 수많은 고객들과 치과 상담부터 애들 교육문제까지 서로 고민을 나누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일이 참 행복해요. 마치 사회 속에 새로운 패밀리가 형성된 기분이에요."
은퇴 체육인 도움 주겠다
양씨는 바쁜 일상 틈틈이 경기대학교 체육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은퇴한 체육인들에게 다양한 자립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앞으로의 꿈이다.
"엘리트 체육 체제에서 키워진 운동선수들은 사회에 대해 무지한 편이죠. 그러니 은퇴한 후의 삶이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운동할 때의 열정이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자신의 가능성을 믿으라고요."
● 사회에 진출하는 운동선수들을 위한 양종옥 LP의 조언
1.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라-운동선수들은 오랜 기간 규칙적인 훈련을 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성실하다. 철저한 시간관리와 성실성을 자신의 브랜드로 내세우라.
2.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라-'밥 먹고 운동만 했으니 뭘 알아' 라는 시선 앞에 당당하라. 운동하던 시절의 사진이나 이력을 홍보하라. 운동을 했다는 것은 젊은 시절의 열정을 보여주는 표창장이다.
3. 끊임없이 변화하라-운동선수 출신들은 동물적 본능을 갖추고 있다. 직장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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