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고의 무대이지만 오직 32개국 736명에게만 허락된 월드컵 본선 그라운드. 축구에서도 '은둔의 나라'였던 북한 선수가 월드컵에 출전하는 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정대세(26ㆍ가와사키)는 월드컵을 "꿈속에서도 꿈꿨던 무대"라고 했다. "TV를 통해 보고, 즐기는 축제의 무대일 뿐 내가 직접 나서게 될 무대가 되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는 정대세의 월드컵 첫 상대는 아이러니 하게도 세계 최강 브라질이었다.
16일(한국시간) 새벽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엘리스파크 스타디움. 브라질 선수들과 나란히 입장할 때부터 눈물을 흘리던 정대세는 국가가 울려 퍼지는 내내 울먹였다. "월드컵에 드디어 나오게 됐고, 세계 최강 팀과 맞붙게 됐기 때문에 좋아서 그랬다"는 게 이유였다.
승부욕 강한 '아시아의 루니' 정대세의 월드컵 꿈은 그렇게 눈물로 시작됐다.
3개의 조국, 그러나 북한 대표팀을 택하다
경북 의성 출신인 아버지의 나라 한국, 조총련계 민족학교를 다닌 어머니의 나라 조선, 그리고 26년 동안 살아온 일본. 정대세에겐 3개의 조국이 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유니폼은 북한의 것이었다.
정대세는 2006년 독일월드컵 예선에서 북한이 일본에게 패하는 것을 보고 북한 대표 선수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한국 국적 선수가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된 조선 국적으로 바꾸는 것은 일본 법률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정대세는 직접 국제축구연맹(FIFA)에 청원서를 보내 남북한의 현실과 가족사를 설명한 끝에 북한 국가대표 선수로 뛸 수 있다는 승인을 받아냈다.
정대세는 재일동포 팬들에게 사인을 해줄 때 '민족의 혼'이라는 글을 반드시 넣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한의 경계를 뛰어넘는 민족의식이 그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북한의 황금 세대, 세계로 나오다
북한 대표가 됐다고 해서 곧바로 월드컵을 꿈꿀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2009년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북한은 한국, 사우디, 이란, UAE와 함께 죽음의 조에 속했다. 탈락이 당연한 것처럼 보였으나 북한은 정대세, 홍영조(로스토프) 안영학(오미야) 등 황금세대를 앞세워 한국에 이어 조2위(3승3무2패)로 본선 무대를 밟는 기적을 일궈냈다.
정대세는 "하늘을 보면서 이게 현실인가 또 한번 의심하고, 동료들과 눈 마주칠 때마다 껴안고 울었다"고 당시의 감격을 표현했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아시아를 벗어나 본 적 없던 정대세는 대표팀의 터키 전지훈련 때 처음으로 유럽을 방문했고, 월드컵을 위해 아프리카 땅까지 밟았다.
불굴의 투지 보여준 인민 루니
세계 최강 브라질에 1-2로 패했지만 세계는 북한 축구, 특히 정대세의 실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정대세는 전반 10분 수비수 3명을 달고 깜짝 슈팅을 쏘아 브라질 벤치를 놀라게 했고, 경기 종료 직전인 후반 44분엔 후방에서 날아온 패스를 페널티지역 왼쪽에서 헤딩으로 떨어뜨려 지윤남에게 연결해 북한이 44년만의 월드컵 복귀 골을 터뜨리는 데 일조했다.
이날 유로스포츠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세계적인 공격수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면서 정대세를'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했다.
그러나 그의 승부욕은 불 같았다. 월드컵에 출전한다는 사실에 가슴 벅차 울었던 정대세는 "우리식으로 잘 가고 있었는데 문지기의 실수로 졌다. 브라질을 상대로 골을 넣었지만 이기지 못해 행복하지 않다"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최약체로 평가받았던 북한 축구의 선전에 '죽음의 조'에서 '지옥의 조'로 탈바꿈한 G조. 포르투갈과 코트디부아르가 벌써부터 정대세와 북한의 기량에 경계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한준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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