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의 여지가 없다, ‘피의 일요일’에 영국군이 저지른 일은 용납할 수도, 정당화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영국 정부에 궁극적인 책임이 있으며, 깊이 사죄한다.” 데이비드 캐머론 영국 총리의 사과연설이 생중계된 15일(현지시간), 북아일랜드의 제2의 도시 데리(Derry)의 길드홀 광장에 모여 TV를 지켜보던 1만명의 데리 시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데리시는 1972년 ‘피의 일요일’사건이 발생한 현장이다.
영국 정부가 ‘피의 일요일’사건에 대한 전면 재조사를 실시한 지 12년 만에 과거 조사결과를 뒤집고 “전혀 무기를 갖지 않은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영국군이 먼저 발포를 했다”고 최종보고서를 발표했다. 사건 직후 10주 만에 내놓았던 “일부 시위대가 폭탄, 총기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들이 먼저 발포해 군인들이 응사한 것”이라는 조사결과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38년 만에 마침내 정의가 세워졌다”고 보도했다.
영국 하원에 출석해 직접 보고서 내용을 설명한 캐머론 총리는 “조사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며 “보고서의 결론은 명확하다”고 말했다. ‘피의 일요일’은 전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지만, 영국에서는 조사결과가 왜곡되면서 유족들은 오랜 기간 한을 풀지 못했었다. 그러다 1998년 토니 블레어 당시 총리가 유족과 가톨릭교도측의 의혹제기를 받아들이면서 재조사가 시작됐다. 법관 출신인 새빌 경을 위원장으로 조사위원회를 꾸려 피해자, 가해자, 목격자 등 900여 명의 증언을 들었고, 정부 및 군 자료 등을 조사했다. 이날 공개된 ‘새빌 보고서’는 총 10권으로 5,000쪽 분량에 달한다. 조사비용만 1억9,500만 파운드(3,500억원)가 들었다고 한다.
조사 결과, 시위대는 특별히 영국군을 도발하거나 위협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으며, 영국 병사들은 총격을 가하기 전 어떤 경고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계획된 발포는 아니었고, 과거 조사에서 영국 병사들이 위증을 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영군군은 당시 “무장세력이 접근하고 있다”고 오인하고 있었으며, 첫 사격을 가했던 N중위는 주변병사에게 미칠 효과를 인식하지 못했다. 현장 군 전체에 발포의 원칙이 무너져 있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캐머론 총리의 발표가 있은 직후 당시 군 책임자였던 마이크 잭슨 경도 희생자들에게 사죄했다.
북아일랜드 검찰은 “가해자들을 살인, 위증 등의 혐의로 기소할 수 있는지 검토 중에 있다”고 밝혀, 가해자에 대한 사법처리도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피의 일요일'사건이란
1972년 1월 30일 영국령 북아일랜드 데리시에서 영국군이 시위대에게 발포해 14명이 사망하고, 13명이 중상을 당한 사건이다. 사망자 중 7명이 10대학생이었으며, 등뒤에서 총을 맞은 경우도 다수였다. 1819년 노동자 학살사건이었던 ‘피털루(Peterloo) 대학살’ 이후 영국군이 자국 영토에서 자행한 최악의 사건이며, 독립을 추구하던 북아일랜드공화국군(IRAㆍ1919년 결성)이 무장투쟁에 나서게 된 계기가 됐다.
비극의 배경에는 북아일랜드의 복잡한 종교적 갈등이 있다. 원래 아일랜드는 가톨릭의 나라인데, 영국이 식민강화를 위해 17세기부터 영국 본토에서 가까운 북아일랜드 지역을 중심으로 청교도들(신교파)을 이주시켰다. 이런 이유로 1921년 아일랜드가 700년 만에 영국에서 독립했을 때, 영국계 이주민들이 많은 북아일랜드만은 영국령으로 남게 됐다.
그러다 선거ㆍ주택ㆍ고용 등에서 차별을 느낀 북아일랜드의 소수 가톨릭교도들(구교파)은 1960년대 말부터 시위에 나섰다. ‘피의 일요일’ 사건도 ‘민권 신장’을 요구하는 가톨릭교도들의 집회 과정에서 발생했다. 30년간 신ㆍ구교 정파 유혈분쟁으로 3,600여명이 희생당한 끝에, 1998년 평화협정, 2005년 IRA 무장해제, 2007년 5월 공동정권이 출범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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