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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 <37>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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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 <37>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의 수난

입력
2010.06.15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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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일하는 데 초석을 놓은 임금으로 평가되고 있다. 즉 백제 땅인 한강을 장악하고 영토를 넓혀 나갔다. 그 증거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巡狩碑)이다. 순수비는 함경북도 함초령과 마운령에도 있었고 척경비는 경남 창령, 단양 적성 두 곳에 남아있는데 북한 땅에 있었던 함초령 비는 임진왜란때 왜병이 파괴한 것을 광복 후 마운령 비와 함께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전하고 있고 남한에 있는 북한산 비와 창녕 비, 단양 적성 비는 잘 보존되고 있다.

북한산 비는 현재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실에 전시되어 박물관을 찾는 사람을 맞이하고 있다. 왜 북한산에 있어야 할 비가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을까? 의문이겠지만 전시 설명문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 비는 원래 신라가 한강을 장악하고 북한산 비봉(碑峰) 정상에 세워두었는데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멸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 비가 진흥왕 때 마련된 순수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조선 후기 금석문의 대가로서 秋史體(추사체)로 우리나라 서예사의 일가를 이룬 김정희(金正喜)가 31세의 젊은 시절인 1816년 친구인 이경연(李敬淵)과 북한산 비봉에 올라 이 비석을 보게 되었다. 그때까지 이 비는 조선의 개국과 한양천도와 관련 있는 무학대사 비로 알려져 왔다. 호기심의 발동으로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보기 위해 이끼를 걷어 내고 몇 자 판독하기 시작한 두 사람에게 눈을 의심할 일이 벌어졌다. 즉 이 비가 바로 신라진흥왕순수비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세운 지 실로 1200여 년이 지나서야 비의 주인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추사는 이 비를 발견하고 이듬해 다시 조인영(趙寅永)과 같이 비봉에 올라 68자를 확인하고 탁본까지 해서 추사와 같이 연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의 측면에 신라진흥왕의 순수비라는 사실과 함께 발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글자를 파서 새겨두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 행위는 문화재 훼손 행위라 할 수 있다.

비석은 비봉 정상에 홀로 서 있으면서 6.25전쟁 때에 뒷면에 20여 발의 총탄 세례를 받기도 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고 1962년 국보3호로 지정하였으나 보존의 필요성 때문에 1972년 8월 일단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보관하여 오다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지금과 같이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아울러 비봉의 원위치에는 지난 2006년 10월 복원 비를 다시 세웠다. 문화재청이 복원자료를 토대로 강화도 산 화강암으로 복제한 것이다.

비는 높이 1.5m에 폭 69cm, 두께 16cm 규모이지만 광개토대왕비처럼 4면에 글자를 새긴 것이 아니라 신라 비의 특징대로 1면에만 새겼다.

비의 머리 위에 놓는 덮개 돌은 없어져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언젠가 발견된다면 완벽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게 될 것이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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