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그리스의 월드컵 경기가 열린 12일 저녁에 나는 동남아시아의 한 도시에 있었다. 주말이 아니었음에도 모든 바들이 문을 열고 대형스크린으로 축구경기를 보여주었다. 관광객들은 바에 모여 앉아 축구경기를 관전했다. 그 바에 한국인은 나 밖에 없었고 그리스인은 한 명도 없었다. 골이 들어가자 관람객들은 조용히 탄성을 지르고,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러나 나는 그야말로 악악거리며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리하여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바 전체에 알렸다. 그야말로 존재의 증명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았고,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뿌듯했다. 턱이 5cm만큼은 올라가 제법 거만한 표정을 짓기도 했으리라. 니들 봤지, 이게 바로 한국이야. 뭐, 그런 표정은 아니었을까.
단결과 축제의 중심
축구 하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몇 년도의 월드컵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예선전이 치러지고 있었던 때였다. 개인적으로 무슨 언짢은 일이 있어서 잔뜩 울 준비를 하고 있는데 틀어놓고 있던 TV에서 골이 들어갔다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잠시 뒤에 울 생각으로 TV를 보기 시작했다. 그날 경기에서 골이 들어가도 너무 많이 들어갔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다섯 골쯤은 넣었을 것이다.
축구경기가 끝났을 때, 울 생각 같은 건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신나게 환호한 후에 다시 울기도 민망한 일이거니와 너무 신나 하는 동안 울고 싶을 정도로 언짢았던 기억도 뭐 그게 별건가 싶어져 버린 것이다. 축구란 게 참 별나다. 축구경기라고는 월드컵 밖에는 보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게 조차 이건 너무 엄청난 이벤트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에는 3S정책이라는 말이 있었다. 섹스와 스포츠와 스크린. 대중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정치적인 현안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이른바 혹세무민의 정책을 일컬음이었을 텐데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러 스포츠나 스크린은 혹세무민은커녕 단결과 축제의 중심이 되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은 한국인들이 오래 잊고 있던 축제의 정신을 부활시킨 사건이라 할 만하다. 그 후로부터 사람들은 잘도 모였다. 모이면 꼭 서울시청 앞 광장이었고, 그것이 어떤 사안이던 간에 모이면 꼭 축제였다. 비참하고 비감한 사건으로 모여도 마찬가지였다.
지방선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월드컵 때문에 잠시 잊고 있겠지만, 그야말로 며칠 전의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선거의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후보들은 그 순간을 위해 수많은 공약들을 날렸다.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을 터이니, 그것이 밝혀지는 것도 이제부터이다. 투표에 참여했든 안 했든, 유권자들은 이제부터 감시인이다. 그런데 그 일이 즐거운 축구경기처럼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온 힘을 다 해 경기장을 뛰고, 관중들의 응원에 보답하고, 근사한 골을 날리고, 감사와 감동의 세리모니를 하는 축구선수들의 경기처럼 정치가 신나거나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헛된 기대라는 것은 안다. 정치의 본성이 그렇지가 못하니. 그러나 최선을 다한 성실한 플레이에 관중들은 언제나 너그럽다. 선수들은 경기장에 있고 관중은 관람석에 있으나, 우리가 이미 한 몸이기 때문이다.
최선 다하는 성실한 정치를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원하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이미 한 몸이다. 정치인들은 흔히 '이것은 국민의 승리입니다'라는 말을 한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그들이 아니라 바로 유권자들이고, 그들은 다만 선택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축구경기가 벌어지는 날 온 나라가 떠나갈 듯이 울려 퍼지는 함성소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존재의 증명'이다. 정치인들은 두려워하고 겸손해 해야 마땅할 일이다. 함성은 경기장 밖, 축제의 마당 밖, 어디에서든 울려 퍼질 수 있으니.
김인숙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