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들어 한국경제는 점점 위기의 늪에 빠지고 있었다. 그 동안 임금과 부동산 값 상승에 따른 고비용구조로 산업경쟁력은 약화된 상황에서 기업은 빚으로 크고 나라경제는 외채의 힘으로 성장을 유지했던 것이다. 경제는 외견상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경상수지는 1990년 이후 97년까지 누적적자가 500억 달러를 넘고 기업의 자기자본에 대한 부채비율은 매년 높아져 97년에는 400%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96년 말부터 금융위기의 가능성을 여러 차례 경고한 바 있었다. 96년 12월12일자 매일경제신문, 97년 1월2일자 주간조선의 특집대담, 97년 1월6일자 한국경제신문의 새해 특집논단 등을 통해서 빚으로 경제와 기업이 성장하는 시스템을 고치지 않으면 멕시코의 국가부도 사태와 같은 금융공황이 온다는 것을 지적하고 경제의 과감한 감량 구조조정과 국민들의 내핍체제를 역설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외면했던 것이다.
1997년에 들어서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1월에는 재계서열 14위였던 한보가 도산했으며 3월에는 삼미그룹이, 5월에는 대농과 한신공영이 부도를 냈다. 이 때 태국으로부터의 외환위기 폭풍이 밀어 닥쳤다. 바트화의 폭락으로 시달려온 태국은 7월2일 드디어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그 여파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홍콩 등으로 퍼져나갔다.
그 동안 우리는 부도상황에 있는 대기업들을 은행 간 협조지원으로 부도를 유예시켜왔던 것인데 태국사태 이후 10월 들어서서 기아 쌍방울 뉴코아 해태 등이 줄줄이 부도를 내고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특히 재계 순위 8위였던 기아는 10조원의 채무를 은행에 떠넘겼다. 이렇게 되자 외국자본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외환보유고는 39억 달러까지 내려가 바닥이 났다. 그래서 97년 11월21일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금리는 10%수준에서 25%수준으로, 환율은 달러당 800원대에서 1,500원 수준으로 급등하고 3만개의 기업도산과 200만 명의 실업이 생기고 주가는 폭락했다.
97년 12월18일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전이었지만 위기대책을 진두지휘하였다. 대기업·금융·정부·노동 등 4대 부문의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공적자금을 조성키로 했다. 그리고 이 자금을 투명하게 관리하기 위해 2001년 2월12일 공적자금 관리위원회(약칭 공자위)를 발족시켰는데 나는 초대 공동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2001년 초 나는 하와이에 있었다. 그 때 하와이 대학의 동서 문화센터 중심으로 상벽회(常碧會)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동북아 문제에 대해 세미나도 열고 친목도 도모하는 모임이었다. 나는 방학 중 여기 참여하고 있다가 진념 재경부장관으로부터 공자위 공동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전화를 받고 곧 귀국하였다.
이 위원회는 경제 구조조정을 위해 투입되는 공적자금의 운용에 대한 심의 조정을 위해 '공적자금관리 특별법'에 의해 설치된 기구로서 진념 부총리와 내가 공동위원장을 맡고 그 밖에 정부쪽에서 전윤철 기획예산처 장관과 이근영 금융감독 위원장, 민간쪽에서 어윤대 교수 강금식 교수 유재훈 박사 김승진 변호사 등이 위원으로 임명되어 도합 8명으로 구성되었다. 회의는 무교동의 예금보험공사에서 매주 열려 공적자금의 조성과 투입 회수 등에 관해 토의하고 의결하였다.
이때 기업의 부실과 도산이 금융기관의 부실로 번져 전 금융기관의 부실여신은 98년 6월 현재 136조원으로 총여신의 26%에 이르고 이중 은행의 부실여신비율도 14%에 이르렀다. 그래서 정부는 본격적인 금융구조조정에 착수하여 동화 동남 대동 충청 경기 등 5개 은행을 퇴출시키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98년에 1차로 채권발행을 통해 64조원의 공적자금을 조성하였다. 이 자금은 퇴출은행의 예금 대지급, 금융기관에 대한 증자,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인수 등의 용도로 투입되었는데 그 결과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은 크게 줄어들어 사태가 진정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99년에 들어서서 대우 동아건설 대한생명 우방 등 대기업의 부도가 또 터지고 종금사 금고 신용협동조합 등 제2금융권의 부실이 노출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대우의 부도는 금융부채만 해도 70조원을 금융기관에 떠넘겼다. 그래서 2000년 9월에 제2차로 40조원의 공적자금을 예금보험공사 채권발행을 통해 추가로 조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2001년 말까지 공자위가 관리한 총 공적자금은 정부지급보증 채권발행으로 조성된 104조원과, 회수되어 재투입된 자금 및 기타의 공공자금 등을 모두 합해 약 160조원에 달했다. 이 자금을 투입하여 과감한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외환위기 발생 당시 33개였던 은행은 13개가 퇴출되고 20개가 남았으며 은행원 수는 42%가 줄었다. 그리고 30개였던 기업집단은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16개가 퇴출되고 14개가 살아남았다. 그 밖에 종합금융회사 신용협동조합 각종 금고와 상호금융 등 제2금융권도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겪어야 했다.
그 결과로 우리경제의 기본체력은 튼튼하게 다져졌다.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이 거의 정리되어 은행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으며 기업의 자기자본에 대한 부채비율도 97년의 400%에서 2001년에는 130%로 낮아졌다. 국제수지도 그 동안의 만성적자에서 벗어나 큰 흑자로 반전했으며 외환 보유고도 크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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