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하기 싫어서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한 소년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때의 일이다. 같은 반 친구가 달리기 대회 나간다고 수업시간을 빼 먹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참을 수 없었던 소년은 그 길로 당장 선생님에게 달려갔다. "저도 저 애처럼 잘 달릴 수 있으니 선수로 뽑아 달라"고 간청했다. 선생님은 당돌하지만 '싹수'가 있어 보이는 어린 제자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소년은 육상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0여 년 후 그 소년은 남자육상 100m 한국기록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지난 7일 대구 스타디움에서 열린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서 31년 동안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던 10초34를 하루에 두 차례나 허물고(10초31, 10초23) 한국 육상에 새로운 발자취를 남긴 주인공. 그가 바로 김국영(19ㆍ안양시청)이다.
자신이 태어나기 훨씬 전인 1979년 서말구가 세운 10초34는 '고장난 시계'처럼 꿈쩍 하지 않고 한국육상의 심리적 저지선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겁 없는 10대 김국영이 10초34 고장난 시계를 산산조각내면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6일 오후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투박한 휴대폰 벨소리 대신 미국의 팝스타 피 디디(41ㆍP. Diddy)가 부른'I will be missing you'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앳된 목소리가 전화기 저 너머에서 들렸다. 그는 내일(7일)아침 일찍 태릉선수촌 전지훈련지인 강원도 태백분촌으로 떠나기 위해 준비물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고 말했다. 태백분촌은 해발 1,330m고지에 위치해 선수들의 심폐지구력 향상을 위한 안성맞춤인 장소.
"한국기록을 갈아치운 지 일주일이 흘렀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그는 뜻밖에"내기록을 이미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다"고 말했다. "기록 한 번 냈다고 주위 분위기에 편승해 우쭐하다 보면 자칫 퇴보할 것 같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이어 "고립무원의 고지 태백분촌에서 다시 한번 신발끈을 바짝 조이고 오겠다"고 덧붙였다.
김국영은 올해 초 고교(평촌정보산업고)를 갓 졸업하고 곧바로 안양시청에 입단했다. 당시 육상계는 그가 당연히 대학에 진학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이 같은 예상을 비웃듯 실업팀을 택했다. 김국영은"감독님(강태석 안양시청)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대학진학은 처음부터 생각해보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물론 안양시 고위공무원(문화복지국장)으로 재직중인 아버지 김상문씨의 영향도 컸다.
특히 강태석 감독과 김국영의 인연은 꽤나 깊다. 강 감독은 김국영을 2005년 안양 관양중학교 2학년때 만나 육상선수로 본격 지도했다. 김국영의 가능성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런 김국영에게도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때 달리기에 재미를 붙인 김국영은 그러나 공부에 집중하라는 부모님의 반대로 육상을 잠시 접었다. 하지만 김국영의 피 속에는 '스피드 DNA'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결국 "공부에는 흥미가 없지만 육상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아들의 의지 앞에 부모는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2학년 때 그의 스피드 DNA가 당시 이종기 체육선생님의 눈에 띄었고 강 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해 4월 제7회 꿈나무선발대회에 나가 100m에서 3위를 차지한 것이 첫 걸음이다. 김국영은 이후 주로 400m 계주에서 뛰었으나 이듬해 종별육상대회에서 100m를 11초02를 찍으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중고등부를 거치면서 100m 1인자로 자리를 굳힌 김국영은 특히 지난해 춘계중고대회에서 10초47로 고교신기록을 작성하는 등 단거리 계보를 이어갈 재목으로 인정받았다.
시합이 다가오면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 진다는 그는 "약간 긴장을 해야 기록이 잘 나온다"고 말했다. 레이스가 끝나면 잘 뛰었던 못 뛰었던 '수고했다'는 의미로 자신에게 선물을 한다는 그는 두 달 전 10초17 비공인 한국기록을 세웠을 땐 40만원 상당의 유명브랜드 지갑을 샀다고 귀띔했다. 김국영은 또 스트레스가 쌓이면 태릉선수촌 동갑내기 친구(박봉고, 신진식)들과 노래방에 가서 한 바탕 신나게 소리지르고 놀다 보면 풀린다고 말했다. 즐겨 부르는 노래는 슈프림의 슈퍼매직과 윤도현 밴드의 사랑 two.
그는 신세대답게 자신의 단점에 대해서도 솔직하다. "후반부 70m쯤 가면 턱이 들려, 상체가 뒤로 젖혀지는 것"이라며 "감독님의 조언을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다 받아들여 내 것으로 삼을생각이다"고 말했다. 올해 초 김국영을 국가대표로 발탁한 장재근 대한육상경기연맹 단거리 기술위원장은 "국영이는 발목 유연성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탁월하다. 키가 176cm로 비교적 단신인 점이 걸리지만 근력 강화로 보폭을 늘려가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 기록(9초99) 경신을 위해 한발 한 발 앞으로 내딛겠다는 그는 가장 존경하는 선수로 아사파 커?28ㆍ자메이카)을 꼽았다. 이유는 달리는 자세가 시원시원해서 맘에 들기 때문이란다.
당장 그에게 떨어진 숙제는 내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 결선진출이다. 그의 10초23은 세계선수권에 출전할 수 있는 B기준기록(10초28)을 넘어선다. 그는 "9초58 세계기록을 갖고 있는 우사인 볼트(24ㆍ자메이카)를 비롯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출전함에 따라 내 기록으론 메달획득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아시아선수론 최초로 세계선수권 결선무대에 올라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최형철기자 hcchoi@hk.co.kr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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