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경기를 보는 관중과 시청자들은 시신경을 온통 공격하는 선수들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상대편 골문을 가르는 골이 터지면 화려한 골 세리머니를 펼치는 득점 선수에게 환호와 찬사가 쏟아진다. 반면 고개를 떨군 골키퍼에게는 연민의 눈길은커녕 비난과 야유가 집중된다. 그래서 골키퍼는 외로운 포지션이다. 그의 앞에는 10명의 선수가 뛰지만 등 뒤에는 폭 7.32m, 높이 2.44m 크기의 골문과 그물망만 있을 뿐이다. 골에 대한 골키퍼의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다. 많은 골키퍼들이 골 부담 때문에 만성 소화불량, 불면증, 악몽에 시달린다고 한다.
■ 레프 야신(1929~1990)은 골키퍼의 전설이다. 54년부터 14년 동안 구 소련 대표팀 수문장을 맡아 멜버른 올림픽 우승(56년), 유로 60 우승(60년), 잉글랜드 월드컵 4강(66년)을 이끌었다. 그 기간에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 78경기에서 70골만 허용했다. 또 무려 150개의 페널티 킥을 막아냈다. 팔과 손가락이 길고 검은 색 유니폼을 자주 입어 '거미손''문어발''흑거미'로 불렸다. 그런 그도 골 부담을 떨쳐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야신은 경기 전 라커룸에서 반드시 보드카 한 잔과 담배 한 개비로 긴장을 풀었다고 한다.
■ 골키퍼는 판단력, 순발력이 뛰어나야 한다. 경기 흐름을 꿰뚫으며 팀을 이끄는 리더십도 필요하다. 골키퍼는 골문만 지키는 게 아니다. 페널티 지역에서 경기 전체 흐름과 상대ㆍ동료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며 위치를 조정하는 수비 전술의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골키퍼가 결정적 골을 막으면 팀 사기는 높아지지만 반대의 경우 팀은 승리에서 멀어진다. 그만큼 골키퍼가 팀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전문가들은 골키퍼의 역할과 비중을 '11분의 1'이상, 심지어 50%는 된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감독들은 경험과 실력을 겸비한 골키퍼를 선호한다.
■ 그럼에도 허정무 감독은 그리스전에서 관록 대신 패기를 택했다. 결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성룡의 A매치 출전은 16경기로, '센추리클럽'(A매치 100경기 이상 출전)에 가입한 이운재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그러나 정성룡은 완벽하게 실점을 막았다. 골키퍼의 기량은 30대 초반이 절정기다. 그리스전 승리를 계기로 국가대표 수문장은 30대(이운재ㆍ35)에서 20대(정성룡ㆍ25)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놀라운 것은 그토록 중요한 게임에 신예를 발탁한 허 감독의 담대함이다. 그의 리더십도 히딩크 전 감독처럼 연구대상이 될지 모를 일이다.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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