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 인천 해안에 서구 열강의 군함이 나타났다. 당시 이미 중국과 일본에 진출했던 그들은 쇄국 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에도 통상을 요구하며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1866년 프랑스 군함의 병인양요, 1871년 미국 제네럴 셔먼호의 신미양요가 그것이다. 조선은 이들을 물리쳤다.
하지만 1875년 일본이 일으킨 운요오호 사건의 결말은 달랐다. 사건 수습을 빌미로 일본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 부산 원산 인천을 강제로 개항시킨다. 이 조약에 따라 부산, 원산에 이어 1883년 인천이 개항된다. 그로부터 인천은 식민지 근대화의 관문이자 일제 침탈과 팽창의 교두보가 되었다.
인천 자유공원 아래 중구 일대는 개항기에 각국 조계지가 자리잡았던 개항장이다. 인천역에서 나와 길 건너 패루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 차이나타운이다. 화교들의 상점과 중국요릿집이 즐비한 이 거리는 개항기에 청국 조계지였다.
일본 조계지는 그 옆, 자유공원에서 내려다봤을 때 오른쪽이다. 서구 여러 나라의 공동조계지는 청ㆍ일 조계지를 에워싸고 있었다. 조선인은 조계지 바깥, 지금의 인천 동구 쪽에 모여 살았다.
조계지는 행정ㆍ사법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하는 치외법권 지대로, 조선 속의 외국이었다. 중국인 일본인 서양인들이 조계지로 들어오면서 신 문물도 함께 들어왔다.
중구 신포동은 당시 개항장의 한복판으로, "신포동에 없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구할 수 없다"는 말이 있었을 만큼 온갖 상품이 수북했고 행인들로 북적댔다. 각국 영사관을 비롯해 외국인 별장과 주택, 학교, 교회, 은행, 우체국 등이 속속 들어서서 다른 데선 볼 수 없는 개항장의 풍경을 만들었다.
인천 중구에는 지금도 개항장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중구청 아래 일본은행 거리의 구 일본제1은행, 제18은행, 제58은행을 비롯해 신포사거리의 옛 인천우체국, 개항장 서양인들의 사교클럽이었던 제물포구락부 등이 대표적이다.
1883년 일본제1은행을 필두로 개항장에 등장한 일본 은행은 일본이 조선의 금과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것을 지원하는 첨병이었다. 1885년 설립된 일본우선회사 등 일본 업체는 인천항의 수출입 해운을 거의 독점했다. 1910년 강제병합 이전에 벌써 일본은 인천을 통해 침탈의 마수를 깊이 뻗쳤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인천은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몰려든 노동자와 일확천금을 노린 투기꾼 천지였다. 1920년대 농촌은 빈농이 전체의 75%였을 만큼 피폐했다. 살 길을 찾아 도시로 가는 이농 인구는 1925~29년 20만명에서 1935~39년 148만명으로 급증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인천으로 와서 방직공장과 부두 등에서 일했다.
박팔양의 시 '인천항'(1927)은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로 붐비던 부두 풍경을 다음과 같이 그린다. '상해로 가는 배가 떠난다/…/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 부두에 산같이 쌓인 짐을/ 이리저리 옮기는 노동자들/ 당신네들 고향이 어데시요? ?/ '우리는 경상도' '우리는 산동성'/ 대답은 그것뿐으로 족하다는 말이다'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항구에는 중국으로 팔려가는 조선 여인과, 그들의 짐을 옮겨주는 지게꾼도 많았다. 부두 노동자들의 땀방울에는 망국의 눈물과 한숨이 짙게 배어 있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그린 소설로 유명한 강경애의 '인간문제'(1934)도 인천이 배경이다. 지주와 갈등 끝에 부치던 밭을 떼인 주인공은 인천으로 와서 부두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에 눈을 뜬다. 그가 좋아하는 여인이 지주에게 농락당한 뒤 도망쳐서 일하는 곳도 인천의 방적공장이다. 소설 속 당시 인천항의 부둣가 풍경을 보자.
'잠깐 동안에 수천명이나 되어 보이는 노동자들이 축항을 둘러싸고 벌떼같이 와와 하며 떠들었다. 그들은 지게꾼이 절반이나 넘고, 그 외에 손 구르마를 끄는 사람, 창고로 쌀가마니를 메고 뛰어가는 사람, 몇 명씩 짝을 지어 목도로 짐을 나르는 사람, 늙은이, 젊은이, 어린애 할 것 없이 한 뭉치가 되어 서로 비비며 돌아가고 있다.'
뼈빠지게 일해도 살기는 힘들었다. 1935년 인천 부두노동자 총파업은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의 분노와 저항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빈농 출신이었다.
한일 강제병합 후 인천은 조선 곡물의 수탈 기지가 된다. 쌀과 콩의 선물거래 시장인 인천 미두취인소는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 다음으로 거래가 많았다. 1917~28년 12년 간 한국의 쌀 생산량은 연평균 1,400만 석으로 그 중 절반인 700여만 석이 일본으로 반출됐다. 미두취인소는 투기장이 되었다. "논밭은 동양척식회사에 뺏기고, 얼빠진 부자들의 낱곡이나 돈은 모두 미두 바람에 날린다"는 말이 돌 만큼 미두로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일제는 인천을 다시 병참기지화한다. 외곽의 부평 지역에 미쓰비시, 미쓰이, 이토, 닛산 등 일본 재벌의 기계공장, 자동차공장, 방적공장이 들어섰다. 이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마침내 패망하기까지, 인천은 개항이 가져온 국제도시의 냄새가 침략과 수탈의 이빨 자국과 공존했다.
지금의 자유공원은 개항과 일제강점기, 해방과 전쟁으로 이어진 인천의 근현대사가 압축된 공간이다.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1888년 조계지 안에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이곳은, 한국전쟁 중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의 동상을 세우면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맥아더 동상이 선 자리는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의 인천해전 승리를 기념해 일본 전함의 마스트를 세웠던 곳이다.
장미꽃이 만발한 6월의 자유공원은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많다. 일제강점기에도 학생들의 소풍지로,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였다. 개항 이후 120여 년, 그 긴 세월 역사의 굴곡이 초여름 햇빛 아래 뿌옇게 흩어지고 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 근대 건축물 교육·관광자원 활용
구한말 개항장이 들어섰던 인천 중구는 그 시절의 유산인 근대 건축물들을 교육ㆍ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청국 조계지가 있었던 차이나타운의 복성동 주민센터는 건물 외관부터 중국풍이고, 일본 조계지였던 중구청 앞 거리의 상가는 일본식 가옥 모습으로 꾸며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인천시는 지난 2월 신포동, 북성동, 동인천동 일원을 '개항장 문화지구'로 지정했다.
개항장의 중심부였던 중구청 아래 일본은행 거리에 남아 있는 은행 건물 3채 중 일본제1은행은 오는 7월 '인천 최초사박물관'으로 문을 연다. 근대 문물이 처음 상륙한 개항장 인천의 역사를 돌아보는 유물들을 전시할 예정이다. 제18은행 건물은 현재 근대건축전시관으로 쓰고 있다.
외국인 별장, 각국 영사관, 해관, 성당과 교회 등 개항장 일대의 근대 건축물 모형을 전시 중이다. 58은행은 인천 중구 요식업조합이 사용하고 있다.
중구 해안동 일대의 인천아트플랫폼은 개항기 인천항 수출입 해운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일본우선회사 건물과 창고 등 근대건축물 12개 동을 리모델링한 복합 문화공간이다. 인천문화재단이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으로 운영 중이다. 작가들은 여기 입주해서 일정 기간 머물면서 작업을 하고 그 결과를 전시, 공연 등 여러 형태로 발표한다.
■ "호텔·은행 등 최초 조성… 인천은 역사적 선구지 돼"
흔히 인천의 근대사가 곧 한국의 근대사라고 말한다. 그것은 시대적 전환기에 일어났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인천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인천이 갖는 지리적, 입지적 중요성이 역사적으로도 '선구지'가 될 수밖에 없는 요인이었다.
1883년 개항되자 인천항은 각국인들이 몰려들면서 그들만의 거류지가 생겨났고 일본, 청국, 각국공동조계가 차례로 조성되면서 자의든 타의든 국제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특히 해관, 외국인 상사, 은행, 서구식 주택, 공원, 호텔, 경인철도, 갑문식 도크 등 생활의 편의를 위한 각종 근대문물과 사회시설 등이 최초로 도입되고 조성되었다.
근대식 관세를 총괄했던 인천해관이 1883년 6월 16일 최초로 문을 열자 이화양행을 필두로 세창양행, 타운센드상회 등 서구 무역상사가 진출하였고 그들을 위한 주거시설이 만들어졌다. 세창양행은 함부르크에서 온 사원을 위해 현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부근에 최초의 서구식 주택인 기숙사 건물을 지었다.
188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각국공동조계가 설정되었는데, 그 위치는 일본조계와 청국조계를 제외한 응봉산 일대(현 자유공원)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1888년에는 러시아 측량기사 사바찐의 설계로 최초의 서구식 공원도 조성되었는데, 이 'Public Garden'이 각국인 공동의 휴식처로 기능하면서 '각국공원' '만국공원'이라는 명칭으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이국땅에서의 영원한 안식처였을 외국인 묘지도 각국조계 획정과 함께 마련되었다. 1883년 7월 최초의 매장이 있었던 이 묘지에는 의료 선교사였던 랜디스, 인천해관의 오례당, 세창양행의 헤르만 헨켈, 타운센드상회의 월터 타운센드 등 개항기 인천과 인연을 맺었던 인물 등의 묘 총 66기가 남아있다.
또 개항과 함께 인천에는 구미 각국의 외교 사절, 선교사, 여행객들이 입항하였고 특히 서양인을 상대로 하는 근대적 숙박시설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호텔이 생기게 되는데 그 첫 호텔이 1888년 세워진 대불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1902년 세워진 서울 중구 정동의 손탁호텔보다도 4년 앞서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다.
이외에도 인천에는 성냥공장, 서구식 사립 초등교육기관, 팔미도 등대, 천일염전, 월미도 조탕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 최초'에 해당되는 많은 문화가 형성되었다.
근대 개항장으로 기능했던 인천에 타 지역보다 앞선 내용들이 많을 수밖에 없지만, 근현대에 있어 '최초'라는 사실들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은 평가자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그 답이 도출되는 문제일 것이다.
강옥엽/ 인천시역사자료관 전문위원ㆍ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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