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시 정량동 태평동 일대의 산비탈 동네를 토박이들은 동피랑 마을이라고 부른다.
통영항을 내려다보고 앉은 동쪽 비랑(벼랑의 사투리) 마을이라는 의미다. 지역 환경단체인 '푸른통영21'이 이 오래된 비탈 동네를 재개발하겠다는 시를 설득해 2007년 벽화마을로 만들었다.
이제 전국적으로도 제법 알려진 이 곳 동피랑 마을 맨 꼭대기 집에 열흘 전쯤 소설가 겸 화가인 이제하(73) 선생이 이사를 왔다. 주민이 떠난 빈 집 세 채를 시에서 손 봐 예술가들에게 임대한 거였다. 이 선생은 "오는 가을 전람회 주제를 '바다'로 정한 터라 통영 거제 고성 바다를 욕심껏 보고 싶어 내려왔다"고 했다.
지난 13일 이 선생의 동피랑 마을 작업실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을 훌쩍 넘긴 뒤였지만, 그는 항구 곁 중앙시장에서 직접 사다 고았다는 우무를 콩국에 말아 대접했다. 소라고둥처럼 꼬불꼬불 이어진 골목길과 그림들, 시야 가득 펼쳐진 항구와 밤바다 풍경에 혼을 빼앗겨 선뜻 수저를 들지 못하는 일행을 보며 빙긋이 웃고만 섰던 이 선생은 "풍경 멋지죠. 그림도 그림이지만, 이 공간이 너무 재미있어서 여기서 딴 짓(?)도 좀 벌여볼까 궁리 중이에요"라며 운을 뗐다.
-딴 거라뇨?
"며칠 전에 연극 연출도 하고 희곡도 쓰는 최강지 선생이 친구들과 놀러 와서 보고는 야외극장으로 그만이래요. 시에서 의자만 몇 개 거들어주면 통영 연극인들 모아서 매주 공연도 할 수 있겠다고 하더군요. 시험 삼아 마당에서 피에로 가면을 쓰고 마임을 해 보이기도 했는데, 구경 온 관광객들이 '대박'이라며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였어요. 나도 기타 들고 노래도 몇 곡 했고요. "
그는 홍대 미대를 나왔지만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고,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 소설도 썼고, 미술ㆍ영화 비평도 했고, 가수 조영남이 불러 더 알려진 '모란 동백'과 미당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노을' 등 여러 곡의 노래를 지어 노래로 음반도 낸 바 있는 전방위 예술가다.
-그럼 그림은요?
"그건 그것대로 작업을 해야죠. 전람회 일정도 잡혔어요.(10월 6일, 서울 경인미술관) 이번엔 파스텔화와 수채화를 주로 할 생각입니다. 짬짬이 굽고 있는 도자기도 몇 점 끼워서요."
-내려오시니 좋으세요?
"좋아요, 다 좋은데…." 말을 아끼려는 듯하다가 잇기를. "바다도 좋고, 벽화도 좋은데 그것만으로는 아쉬워요. 노래든 마임이든 춤이든 뭐든, 살아있는 예술적 볼거리가 있어야 해요. 벽화도 어떤 건 조잡하고…." 푸른통영21은 지난 4월 2차 동피랑 벽화공모전을 벌였고, 참가한 42개 팀은 마을 벽들을 어린이 그림으로 채워놓은 상태였다. 이 선생 집 벽에는 어린 왕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도 이 집 벽화가 내가 보기엔 제일 나아요. 입체감도 좋고, 색감도 좋고…. 그런데 내 얘기 기사 쓰려고?"
-네 ;
"그러지 말고, 이곳 주민들 얘기나 써줘요. 내쫓기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불편해도 불평조차 안 하는 분들입니다. 구경 와서는 떠들고 집 안 기웃거리고 서슴없이 대문을 열어보는 사람도 있고…, 사생활 침해가 심해요. 통영시도 그 부분에 대한 배려가 없고요. 와서 구경들 하시는 건 좋은데 주민들의 생활도 존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동피랑 언덕 위로 하늘이 희붐해질 무렵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고, 통영의 밤 바다는 달 없이도 내내 화사했다.
통영=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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