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에는 군사독재정권과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민주화의 큰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예견되기에 충분했다. 1984년부터 불붙기 시작한 민주화투쟁이 1986년 절정을 이룬 점에서도 그러했지만, 1987년 벽두인 1월 14일 군사독재정권의 야만적 고문으로 박종철 군이 죽은 점에서도 그러했다. 김주열 군의 죽음이 4ㆍ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듯이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또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붕괴의 도화선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결과적으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박종철 군이 죽은 직후부터 그런 느낌이 일반화한 것도 사실이다.
내가 홍성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은 것은 바로 이런 때여서 민주화를 위해 할 일이 많았고, 그것은 주로 바깥에서 전개되는 민주화투쟁에 도움이 될 문건을 전하는 거였다. 물론 민주화투쟁의 구체적 전략과 전술은 투쟁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기에 교도소에 있는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할 일이 아닌 점이 있었지만 나는 밖에서 진행되는 일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성격 탓이기도 했겠지만 민주화투쟁 전략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기도 했다. 더욱이 이 중차대한 시기에 민통련이나 양 김씨(김대중과 김영삼)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더욱더 그러했다.
그래서 홍성교도소에 있는 동안 바깥의 민주화투쟁에 조언하기 위해 많은 문건을 써 보냈는데, 이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교도소당국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 문건을 몰래 작성해서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었고, 시국사범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 일을 경계했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교도관을 통해야 문건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기에 나는 홍성교도소에 가서도 당연히 교도관 한 명을 포섭할 생각을 했다. 그런데 홍성교도소는 지방 교도소인 데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그런 일을 할만한 교도관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마침 홍성교도소에서는 시국사범의 수가 3~4명에 불과하고 교도소당국과의 관계도 원만한 때문이었는지 시국사범들에게 특별접견을 허락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교도관을 통하지 않고 특별접견을 통해 문건을 내보낼 생각을 했다.
그러나 특별접견을 하더라도 교도관이 밀착해서 감시할 경우 문서를 전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작전을 세웠다. 교도소당국이 특별접견을 허락하는데도 일단 그것을 사양했다. 교도관들이 그 이유를 묻기에 '마누라 손 한번 잡아 본다고 무슨 득이 있나요. 일반재소자들 보기에 미안하기나 할 뿐이지요'라고 답했다.
그러고서 일반접견을 두어 번 했는데, 후배들이 무척 불편해했다. 자기들만 특별접견을 하기가 미안해서 나에게 특별접견을 권하면서 교도소 당국에도 나에게 특별접견을 시킬 것을 요청했다. 특별접견을 권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도 나는 시치미를 떼고 일반접견을 고집했다. 교도소당국으로 하여금 특별접견을 시켜도 부정물품을 주고받는 일은 없을 것임을 인식시키기 위한 거였다. 그러다 마지못해 특별접견에 응하는 척하면서 특별접견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문건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문건을 작성하려면 볼펜과 종이가 있어야 했다. 종이는 아내가 보낸 편지지를 이용하면 됐지만 볼펜이 문제였다. 교도소에서 가장 엄격하게 통제하는 물품이 볼펜이었지만 나는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부터 항상 볼펜을 소지하고 있었다. 평소 사귀어둔 교도관이나 소제를 통해 볼펜 심을 구해서는 그것을 양장본으로 된 헌법책의 표지에 길게 구멍을 파서 거기에 감추어 두었다가 필요하면 꺼내 썼다. 이감을 갈 때도 그런 식으로 가져갔다.
이처럼 치밀하게 준비해서 비밀문건을 작성해서 밖으로 내보냈는데, 문건을 아내에게 전하는 과정도 치밀해야 했다. 특별접견의 경우 보통접견 온 가족과 나란히 앉았으나 나는 일부러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나란히 앉을 경우 접견을 하면서 부정물품을 주거나 받을 것으로 의심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접견을 하면서도 차를 따라주는 종이컵에 문건을 넣어 전했다. 즉 종이컵으로 차를 따라주면 그것을 마시고는 그 속에 문건을 넣어 전했던 거다. 교도관이 옆에 있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87년 6월 민주항쟁 전후처럼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밖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글을 써 보내기 위해선 바깥 정세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했다. 교도관들이나 접견 온 사람들로부터 바깥 정세를 전해 들었지만 그것으로는 크게 부족했다. 신문을 직접 봐야 했다. 마침 재소자의 교육과 복지를 관장하는 교무과의 백모 부장이 나에게 호의적이어서 교무과에 가서 신문을 볼 수 있었다. 만약 특별접견을 통漫?문건을 내보낼 수 없었다면 백 부장을 통해 내보냈을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출소 후 충남 대천에 사는 강모 출소자의 초청으로 함께 대천에 가 고급 횟집에서 푸짐하게 식사한 일이 있는데, 식사 후 밥값을 내려 했더니 '징역 살고 나온 사람들이 무슨 돈이 있느냐'면서 기어이 자기가 냈다. 그 뒤 전화만 몇 번 주고받다가 지금은 소식마저 끊겼으니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치부하지 않을까 두렵다. 하기야 배은망덕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설사 민주화라는 대의를 위해서라도 이처럼 철저하게 근무자들을 속이고 불법을 행해도 되는 걸까? 즉 목적이 정당하면 수단이 불법이어도 상관없을까? 심지어 나를 믿고 감시를 소홀히 한 근무자들로서는 배신감을 느낄 일이었는데, 그래도 될까?
한마디로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런 속임과 불법은 옳지 않고, 그래서 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러나 군사독재정권이 민주화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불법을 자행하는 상황이라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논어의 '大德不踰閑 小德出入可也(대덕불유한, 소덕출입하야), 곧 큰일을 위해서라면 작은 일은 도리에 어긋날 수 있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이처럼 치밀하게 준비해서 어떤 문건을 내보냈는지는 다음 회에서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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