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노예는 주인이 속한 사회에서는 아무런 법적 권리가 없는 반면, 주인은 노예에 대해 무한한 권리를 갖고 있었다. 중세 서양에서도 영주와 농노는 당연히 법 앞에서 평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동양도 마찬가지였다. 사대부와 평민은 그 적용하는 법이 달랐다.
이렇게 인간이 법 앞에서 평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모두들 법 앞에서 우월한 지위에 오르려고 노력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그런 게임의 규칙은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이기면 주인이 되고 지면 노예가 되었다. 중세 서양에서는 이기면 영주, 지면 농노가 되었다. 동양에서도 처음에는 전쟁이 게임의 규칙이었지만 점차 과거제도로 바뀌었다.
시장경제 일군 과학기술ㆍ근로
사정이 그러니 사회의 가치관도 그에 맞추어졌다. 서양 고대와 중세에서는 '훌륭한 전사'가 가장 바람직한 인간형이었다. 동양에서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가장 훌륭한 인간형이었다. 반면 사회를 먹여 살리는 생산자는 그런 인간형이 못 되었다. 생산은 법 앞에서 열등한 지위에 있는 노예나 농노, 수공업자나 상인의 일이었다.
근대 사회가 고대나 중세와 구분되는 중요한 점은 인간에게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하고, 그에 따라 고대나 중세와 다른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면, 법 앞에 우월한 지위를 얻기 위해 경쟁할 필요는 없다. 그 대신 사람들은 누가 더 생산에 기여하는가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그 중요한 바탕은 '시장경제'다. 시장에서 창의와 혁신으로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는 능력으로 경쟁하는 것이 근대의 게임의 규칙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과학기술과 근로의 힘이다. 근대의 바람직한 인간형도 무엇보다 이런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새삼스럽게 이런 역사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런 문제가 지금 한국에게 옛날 이야기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도 갑오경장 이후 법 앞의 평등 원칙이 도입되었고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이 정말 그런가. 바로 지금 검사 스폰서 사건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약과다. 아마도 금액으로 비교가 안될 것으로 생각되는 '전관예우' 문제도 있다. 이 문제는 현직에서는 더 깨끗하다는 판사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법 앞의 평등 원칙이 안 지켜지면 누구나 법 앞에 우월한 지위를 얻고자 경쟁하게 된다. 그 경쟁은 과거의 전쟁이나 과거(科擧)에서처럼 치열할 수 밖에 없다. 당연히 그런 경쟁은 모든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이는 '블랙 홀'이 된다. 사회를 먹여 살리는 기업인이나 과학기술자, 근로자는 재능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은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반영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판사나 검사가 된 사람은 과거의 전쟁 영웅이나 과거(科擧) 급제자처럼 누구나 되고 싶어 하는 지위를 차지한, 존경 받을 사람으로 인식된다. 반면 기업인이나 과학기술자, 근로자가 된 사람들은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으로 인식된다.
나라 걱정케 한 '검사 스폰서'
불행하게도 이 문제는 지난 10여 년 동안 악화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가장 우수한 인재 중에 세계를 상대로 뛰는 기업인이 되어 보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칭 타칭의 천재들이 물리학이나 전자공학에 도전하던 시절도 있었다. 주위에서도 결국 이 사람들이 우리를 먹여 살린다고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과연 지금 그런 분위기가 살아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세계는 갈수록 경쟁적으로 되어 가는데 한국이 이런 식으로 계속 갈 때 어떻게 될 것인가. 성장 동력이 약해지고 국가 경쟁력이 떨어질 것은 뻔한 노릇 아닌가. 더 근본적으로 이 문제는 한국이 진정한 근대 국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검사 스폰서 사건은 단순한 부패 사건이 아니라 크게 보면 나라의 장래가 달린 문제인 것이다.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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