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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36> 식산 이만부의 실심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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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36> 식산 이만부의 실심실학

입력
2010.06.13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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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이후에 조선의 '실학 운동'의 첫 명제가 실심실학이었다. 조선의 실심실학은 전통 주자학을 비판하여 김만중처럼 불교 논리로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장유나 정제두(鄭齊斗)처럼 양명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말하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고 정주학(程朱學) 또한 마음의 학문으로 심학화(心學化)하고 있었던 점에서 기호(畿湖)학파의 김원행ㆍ홍대용들과 함께 영남 지방의 고학자(古學者)로 식산 이만부(息山李萬敷,1664-1732)가 주목을 받았다. 이만부는 성호 이익(李瀷)의 친족이 되는 남인계(南人系)의 유학자로, 당대 세속 유학의 거짓됨을 비판하면서, 상주(尙州) 지방에 숨어 연구와 실천적 삶을 산 실심실학자였다(권태을;'식산의 실심실학' 참조).

"왜 참[實]에 힘쓰라 하는가? 요새 사람들이 '참'에 힘쓰지 않고 겉만 꾸미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제 마땅히 일용인사(日用人事)에서 그 이치[理]를 구하고 본받아 행해야지, 만일 인사의 배움에도 이르지 못하고서 먼저 고원(高遠)한 일을 구한다면, 끝내 실득(實得)할 바가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충성과 믿음[忠信]이 있고, 행실에 어긋남이 없으며[篤敬], 들어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히 하는 일이 곧 실학이라고 할 만하다. 실학에 익숙해지면 실심에 이를 수 있지만, 참으로 실심이 없다면 얻은 바인들 어찌 오래 자기 것으로 하리오?" ('書贈柳勵仲', 권11)

친구에게 써 보낸 이 글에서 "참[實]에 힘쓰지 않고 겉만 꾸미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라는 전제는 당대뿐이 아니고, 요즘 세상에 더 절실한 비판이며 충고이리라. 이만부는 "하늘도 '참'이 있어서 하늘이 되고, 땅도 '참'이 있어 땅이 되듯이, 사람도 '참'이 있어야 사람이 되는 것이라 하고, 실심이 없으면 실사(實事)가 없음을 강조해 마지않았다.

여기서 이만부가 '실심'을 사람의 마음뿐이 아니고 하늘과 땅까지도 다름없이 사람답게 하는 요소로 이해했다는 데 주목하면, 내 마음에 실심이 있으면 하늘의 마음[造物의 生意]과 땅의 마음이 같은 실심으로 사람답게 된다는 이일(理一)의 이치에 이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요산요수(樂山樂水)는 산을 본다고 어질어지고, 물을 본다고 슬기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곧, 어짊[仁]과 지혜[智]를 체득하여 마음에 얻으면 저절로 이 같은 뜻이 있어서 가히 안팎의 몸이 합해진다."('조성지에게 답함(答趙成之'(二書)卷六)

산과 물은 우리의 큰 몸이며, 살이며 피다. 우리의 이 큰 몸이 4대강 삽질로 찢기고 신음하며 죽어 간다. 강은 산에서 흘러 스스로 큰물을 이루어 바다에 이른다. 이것이 순리이며, 이렇게 수수만년 오늘에 이른 강 스스로의 지혜이며, 자연이다. 자연은 스스로 있는 '참 마음'이다. 강을 파는 일은 산을 파는 일이며 하늘의 마음을 파는 일이다.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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