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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희망] <1> 암환자가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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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희망] <1> 암환자가 사는 법

입력
2010.06.10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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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가치·노동의 소중함 깨달아… "암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우리 사회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 사는 방식이나 생각은 달라도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들 같다. 그렇지만 희망이 막연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희생하고 누군가는 앞장서야 사회에 희망이 퍼진다.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의 온기를 나눠주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희망을 탐구하는 이 연재를 암 환자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암이 현대의학마저 한계를 드러낸 무서운 질병이기 때문이다. 취재 도중 만난 암 환자들은 모두 절절한 사연을 안고 있었지만 반드시 낫겠다는 희망도 함께 갖고 있었다. 그들은 병상에 있거나 죽음이 임박한 환자가 아니라, 고비를 넘기고 제2의 삶을 준비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모습을 암 환자 전체의 그것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씩씩하고 강인한 그들의 자세는 모든 암 환자가 공유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사는 최지용(55)씨는 3년 전 이맘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혈뇨가 나와 병원을 찾았다가 신장암 4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미안하다"며 6개월 밖에 못살 것이라고 했다. 평소 건강했던 그는 서둘러 수술을 했지만 자신을 찾아온 암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암세포라는 녀석은 질기고도 모질었다. 첫 수술을 하고도 대장, 비장, 췌장으로 번져 8개월 뒤 두 번째 수술을 했고 다시 3개월 뒤 간의 5분의 1을 잘라내는 세 번째 수술을 했다. 그런데도 암세포가 또 발견됐지만 네 번째 수술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전남 보성의 요양원에서 만난 김영식(40ㆍ가명)씨도 건강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조경 일을 하던 그는 지난해 말 갈비뼈를 차에 살짝 부딪쳤는데 통증이 한달 이상 계속돼 병원을 찾았다가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골수종 판정을 받았다. 뼈가 허물어지고 온몸이 붓는 무서운 병으로 급히 골수이식을 받았지만 관절이 아파 지금도 걷는 것이 어렵다. 김씨는 "내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 병을 앓아야 하는지 하늘이, 세상이 원망스러웠다"고 그때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의 이운영(31)씨는 2008년 8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그는 "등에서 식은 땀이 나고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그때가 그랬다"며 "불안감에 휩싸여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 역시 평소 자신의 건강을 의심한 적 없는 건장한 젊은이였다.

암이 무서운 것은 자각증상이 약해 악성종양을 초기에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병세가 상당히 진행되고 나서야 몸의 이상증상을 느낄 수 있다. 평소 아픈데 없던 건강한 사람이라면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던 이들도 종양 제거 수술을 하거나 골수를 이식 받으면서 서서히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후회도 하고 꼭 살아나겠다는 의지도 다진다.

박영순(42ㆍ가명)씨가 그랬다. 그는 지난해 봄 유방암이 6년 만에 재발했는데 병원에서 손을 쓸 수 없다고 하자 바로 집을 떠나 산중 요양에 들어갔다. 처음 암이 생겼을 때 여동생이 자신을 간병했는데 그 동생이 돌연 위암으로 사망했고 박씨는 거기에서 극심한 충격을 받아 다시 병을 얻었다. 박씨는 "병이 재발한 뒤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박씨는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모범생 콤플렉스 속에서 살아온 듯 했다. 그는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못한 채 세상이 정한 기준, 다른 사람의 요구에 따라 쫓기듯 살았다"며 "가정에서, 사회에서 손해도 많이 보고 양보도 많이 했는데 그 결과가 이런 것인가 싶어서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재산을 정리하고 지인들에게 하나 둘 작별인사를 하면서 차츰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딱 걸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부모님이었다. 여동생도 그렇게 갔는데 자신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면 남은 두 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불효를 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래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산으로 들어갔다. 산에서는 산책, 체조 등을 하고 매일 한 일과 섭취한 음식, 취침 시간 등을 일기에 남기고 법정스님 등의 책을 읽는다.

김영식씨는 얼핏 보면 비관적이지만 그렇다고 삶의 희망을 놓은 것은 아니다. 그는 "말기 다발성골수종 환자는 90% 이상이 3년 안에 목숨을 잃기 때문에 내게는 2년 반 정도의 시간이 남은 것 같다"고 어렵게 입을 뗐다. 삶과 죽음을 초탈한 듯 보이는 그는 그러나 생존하는 동안만이라도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 "어려서부터 종교를 믿어서인지 죽음이 두렵지는 않다. 하지만 살아서 가족에게, 사회를 위해 도움을 주고 싶다. 나보다 약한 사람을 돕고 싶다."

최지용씨는 자신을 "세살짜리"라고 소개한다. 2007년 암 판정을 받고 새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무역업에 종사해온 그는 일로써 인정받고 일을 통해 성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픈 뒤로는 생각이 바뀌었다. 주위 사람들의 작은 위로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이 다 고맙다. 처음에는 아들이 결혼할 때까지만이라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그 아들이 작년에 결혼했으니 이제는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 졌다. 그래도 앞으로 어찌될 지 몰라 한달 이후의 약속은 잡지 않는 것을 보면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세 차례의 수술, 항암제 투약 및 운동 등으로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은 그는 지난해 6월부터 희망근로작업을 하고 있다. 집과 가까운 화곡동의 봉제산이 일터다. 잡목 제거, 공원 정비 등의 일을 하는데 최씨는 "작업복 입고 자전거 타고 출근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와 처가 무척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운영씨 역시 자신이 골수이식 후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이씨는 "신이 내게 기회를 한번 더 주었다"며 "이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골수이식 직후 TV 중계를 통해, 백혈병에 걸렸다가 건강을 되찾은 뒤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수영 선수를 보면서 "나도 저 사람처럼 건강해져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퇴원하자 마자 방 안 걷기를 시작으로 운동을 했다. 몸이 조금씩 나아지자 집 뒤 북한산을 올랐고 지난해 봄부터는 헬스장에 다니고 있다. 그는 지금 가슴팍이 두툼하고 팔에도 탄탄한 근육이 붙어 육체미 선수처럼 보인다. 최근에는 동네 주민들로 야구단을 만들어 감독 겸 투수로 활동하고 있다. 20전 전패의 기록이지만 올해 안에 1승을 거두기로 하고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다.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공인중개사 시험에 도전한 것도 퇴원하고 나서다. 그는 "암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며 "아무리 두려운 일이라도 피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일을 하고 싶다"

암 환자의 걱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경제적 문제. 치료 자체에도 돈이 많이 들지만 돈벌이를 하지 못한 데서 오는 소득의 감소가 심각하다. 요양원에서 만난 이석현(58·가명)씨는 위암 치료를 하느라 재산을 많이 날렸다. 가장으로서 집안 경제를 이끌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몸이 좋아지는 대로 일을 찾아 나설 계획이다. 치료와 돈벌이라는 이중의 걱정에 휩싸여 있지만 큰 스트레스는 받지 않으려 한다. 암 환자가 직면한 또 다른 걱정은 재발의 위험이다. 암의 종류와 진행 정도에 따라 재발률이 70%를 웃돌기도 한다. 재발하면 치사율이 크게 올라가는데 뾰족한 예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고민하고 조심한다고 해서 재발을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아예 그것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암 환자가 많다. 그들은 대신 미래의 자신을 그리면서 투병 의지를 이어간다.

최지용씨는 일하는 게 무엇보다 행복하다. 숲가꾸기 일을 시작한 뒤 종양도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그는 "체력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일을 하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좋아지는 것 같다"며 "일하는 나를 부러워하는 신장암 환우들이 많다"고 말한다. 아프기 전 그는 정년 이후 시골에서 펜션을 운영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으면서도 의미 있는 일, 가령 나무 심기 같은 것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최지용씨를 부러워할 사람이 바로 김영식씨다. 그는 몸이 아픈 것도 그렇지만 일을 하지 못하는 게 못내 서운하다. "이제 마흔, 한창 일할 나이인데 몸이 아파 일을 못한다. 일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들을 부러워하는 나 자신을 보면 내가 노동에서 소외된 노인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건강이 좋아지면 예쁜 수목원을 하나 만들고 싶단다.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나무와 꽃을 구경하고 편히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운영씨는 꿈도 분명하다. 퇴원 후 요리를 배우고 운동도 했는데 이제는 그 둘을 결합해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사람들에게 운동과 식이요법을 병행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다는 것이다.

위암 때문에 수술을 한 뒤 회복기에 있는 이영철(52·가명)씨는 "서울 생활에 지쳤는데 여생은 시골에서 정신적으로 여유 있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과 달리 박영순씨는 아직 몸 상태가 나쁘기 때문에 말을 아꼈다. 그는 죽음까지 염두에 둔 듯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조만간 부모님 곁으로 가고 싶다는 뜻은 분명히 했다. 산에서 요양을 하더라도 부모님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자주 찾아 뵙고 함께 지내는 시간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박광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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