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문제아'그리스의 재정위기가 처음 불거졌던 5월 초, 블룸버그의 저명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은 칼럼에서 1998년 우리나라 외환위기 때의 금 모으기 운동을 거론하며 "지금까지 목격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의 하나"라고 말했다. 나라의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민초들(grass roots)'이 그렇게 노력한 것은 현대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가 이 얘기를 꺼낸 것은 그리스를 포함한 유로존의 열등생들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한국식 금 모으기 운동은 어렵다고 해도 허리띠를 졸라매는 비상한 캠페인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 우리나라 민초의 태도는 흔히 '의병적(義兵的)'이라고 표현된다. 나라가 내우 혹은 외환으로 위기에 처할 때마다 지위 신분 가릴 것 없이 분연히 일어나 불의와 외적에 맞서 싸운 정신이 DNA에 녹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이런 정신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강한 반감이 표출된 '쏠림 현상'을 낳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10년 간 선거 민심은 시계추처럼 극단적으로 좌우를 오갔다. 길게 보면 그것도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듯, 쏠림의 비용도 잘 따져볼 필요가 있다.
■ 이런 민심에 일찍이 주목한 사람은 강준만 전북대 교수다. 그에 따르면 우리 정치인들이 민심을 천심이라고 떠받드는 사이에 집단으로서의 유권자는 영원한 면책특권을 누리며 일관성 검증과 책임에서 자유롭다. 또 이 위대한 민심은 '공중에 띄웠다가 땅바닥에 떨어뜨리기'게임을 즐긴다. 민심이 반감의 대상을 응징한 결과로 반사이익을 얻은 측은 공중에 붕 뜨고 간도 붓지만, 잠시 한눈 파는 사이에 그 민심은 오간 데 없이 사라져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떨어지는 비극이 반복돼왔다는 것이다.
■ 청와대가 어디서 이런 분석을 전해들은 것일까, 6ㆍ2 지방선거 패배를 이유로 국정기조 변화나 당정쇄신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밝혔다. "민심이라는 것은 한쪽으로 쏠렸다고 생각하면 반대쪽으로 다시 균형을 잡아가는 만큼 바람을 좇아 다니지 않겠다"는 것이다. 뭐가 부족했던 것인지 성찰은 하겠으나 선거결과만으로 중심을 잃고 우왕좌왕할 수는 없다는 말도 했다. 일면 수긍할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나 성찰보다 자기변명이 더 짙다. 배를 띄우기도 뒤집기도 하는 민초의 힘과 대상을 수시로 바꾸는 민심의 바람기를 어떻게 달랠 것인지, 여권의 근원적 고백이 필요한 때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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