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임업 시업중의 하나인 간벌(間伐)은 지나치게 많은 나무를 적정한 밀도로 솎아주어 살아남은 나무들에게 빛과 양분을 얻기 위한 경쟁을 완화시켜 주는 작업이다. 그러나 ‘생태학’이라는 학문이 생기면서 간벌은 반생태적 사업으로 간주되어 제동이 걸렸다. 한편 산림생태학자들은 자연적인 산림에서도 경쟁에 의한 일종의 자연 간벌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나아가 간벌로 인해 발생하는 생태적 변화를 목격하게 되었다.
숲의 나무를 일부 제거하자, 열린 임관(林冠)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면서 숲 바닥의 낙엽 분해가 촉진되고 곧 새로운 씨앗이 발아하기 시작했다. 빛과 양분이 풍부한 숲의 조각에서 전혀 새로운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하자 이 맛난 먹이를 찾아 곤충과 초식동물이 꾀어들기 시작했으며 연쇄적으로 이들을 먹으려는 포식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동물들은 나무의 싹이나 씨앗을 선별적으로 공격해 식물종의 구성도 바꾸어놓았다. 그저 나무 몇을 제거했을 뿐인데, 역동적인 생태계가 그 안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생태학자들은 ‘자연 그 자체의 중시’라는 생태학의 고전적 패러다임을 ‘자연의 흐름과 과정을 중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했다. 이렇게 생태학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자연 그 자체를 기술하는 것을 넘어 생태적 과정을 밝히고 이에 근거한 인간의 개입이 허용되었다.
사실 오늘날의 자연이라는 것이 자연 그 자체인 경우는 드물다. 인간의 사회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까지는 대부분 인간의 간섭과 개입이 있었다. 사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으로부터 1차적인 물질을 얻을 수밖에 없다. 식량을 얻기 위한 논 밭 과수원 목장 등으로의 사용을 그 누구도 자연에 대한 파괴죄라고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자연을 위해 인간이 절대적으로 희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를 막기 위해 다양한 법과 제도로 인간의 행위를 규제한다. 그러나 법이나 제도에 의해 보호되는 자연 이외의 자연에 대해서도 모든 것이 허용되지는 않는다. 학문이란 바로 이 지점, 불가피한 인간의 자연 이용에 최선의 방향이 무엇인지 제시해주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미 인간과 함께하는 자연을 관리해 지속성을 확보 함으로써 새로운 자연 이용 수요를 억제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생태학의 고전적 패러다임을 버리지 않고 있다. 생명 존중이나 자연보존 원칙은 존중해야 하지만, 그것을 모든 부분에서 절대적 가치로 받드는 것은 곤란하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생태적 논의 자체가 불필요하다. 오로지 자연을 그냥 두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인간의 간섭을 받은 자연을 이제 와서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은 자연을 방임하는 무책임한 행동이다.
자연을 그저 두고 보라고만 한다면, 생물학 생태학 환경공학과 같은 학문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어떤 내용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 또 생태학자들은 자연을 기술하는 것밖에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세계는 생물학이나 생태학,
환경공학 등으로 창출되는 다양한 기술을 선점하여 상품화하고 있다.
생태학자로서 사회적 커밍아웃을 한 필자에게 온갖 쓴 소리가 쏟아졌다. 그럼에도 필진에게 미리 허용한 재량에 따라 소신을 변명하라고 권유한 한국일보에 감사한다. 자연을 팔아먹었다고 비난하지만, 나는 여전히 6월의 환한 나무를 사랑하며 출렁이는 갈대를 사랑하며 아스팔트 사이의 민들레를 사랑한다.
차윤정 4대강살리기 추진본부 환경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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