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반대편에 세운 전진기지… 엘리제의 삼바춤이 힘차다
지난달 28일 브라질의 최대 상업 도시 상파울루에서 북동쪽으로 120㎞ 떨어진 타우바레 시. 고속도로 바로 옆의 공장 지붕 위로 LG의 자주색 로고가 인사를 건넸다.
LG전자는 1996년 이곳 타우바테 시 정부로부터 1,525㎢(50만여평)를 무상으로 임대 받아 모니터, 휴대폰 및 세탁기 생산 시설을 세웠다. 최근에는 아예 토지 소유권(시가 500억원 상당)을 완전히 넘겨 받아 이를 담보로 대출까지 받은 상태. 비행기로 하루 종일 날아가야 하고, 서울에서 1만9,000㎞ 가량 떨어진 지구 정반대편에 우리나라의 작은 땅이 생긴 것이다. LG가 개척한 21세기 경제 신대륙이다.
정문에서 보안 검색을 마친 뒤 잔디 축구장을 지나 휴대폰 공장으로 들어서자 대부분이 20대인 브라질 여성 근로자 수백명이 각 라인에 늘어서 조립 작업이 하고 있었다. 주로 인쇄회로기판 위에 부품을 자동으로 심는 표면실장장비(SMT)에서 생산된 메인보드와 외주 제작으로 공급되는 케이스를 결합하는 일이었다.
야자수가 늘어선 옆 건물의 모니터 공장으로 가자 이번에는 남성 근로자가 많이 눈에 띄었다. 부피와 무게가 큰 모니터는 아무래도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옆 세탁기 생산 라인 한 가운데엔 큰 대형 TV가 눈길을 끌었다. 새로 라인을 깐 만큼 작업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 생산성이 높은 창원공장 작업 녹화 영상을 틀어 놓고 있다는 설명이 따랐다.
LG전자 타우바테 공장도 설립 초기엔 적자가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2005년 6억5,000만달러에 그쳤던 연 매출은 지난해 13억달러까지 치솟았고, 올해는 15억달러도 훌쩍 넘을 전망이다. 브라질 경제의 성장과 함께 LG전자 브라질 법인의 성과도 커지고 있는 것. 지난해 브라질 모니터 시장의 LG전자 점유율은 33%를 기록, 단연 1위였다.
LG전자가 이곳에 공장을 짓게 된 것은 브라질 정부가 수입품에 대해서는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배경이 됐다. 전자 완제품의 경우 관세와 각종 세금 등을 합할 경우 무려 수입가의 47%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그러나 브라질 내에서 현지 업체들의 부품 등을 일정 비율 이상 사용, 제품을 생산할 때에는 제세금이 한자릿수로 떨어진다. 브라질 기업을 육성하고, 일자리도 창출하기 위한 브라질 정부의 정책이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에서 공장을 운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고용하고 있는 근로자는 모두 2,300여명. 기능직 초봉은 1,000헤알(한화 66만원) 정도다. 그러나 노동자의 천국인 탓에 근로자 1명당 회사의 실질 부담액은 각종 세금과 복리 후생비 및 연금까지 포함, 봉급의 3배에 달한다. 걸핏하면 파업을 하는 탓에 작업에 차질을 빚는 일도 없지 않다. 악착같이 돈을 벌기 보단 인생을 낙천적으로 살길 더 선호하는 터라 주말 잔업 참여율은 50%에 불과하고, 금요일 주급을 받으면 월요일 출근을 안 하는 경우도 적잖다. 한국 숙련 노동자에 비해서는 생산성도 차이 난다. 급하게 필요한 부품이 생겨도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한국에서 배로 들어와야 하는 경우에는 40일이 소요된다.
LG전자는 그럼에도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며 브라질 경제 신대륙을 개척, 그 과실을 따기 시작했다. 올해에는 도요타 대량 리콜 사태 이후 불량품 척결 운동과 무결점(제로 디펙트) 캠페인도 진행하고 있다. 불량 유형들을 모두 한 곳에 모은 뒤 협력업체들을 초청, 시연회를 연 뒤 이를 굴삭기로 밀어 폐기하는 행사도 가졌다.
노도용 공장장은 "가족과 떨어져 산 지 오래돼 힘든 일도 많지만 남미 시장 전진 기지 성공 사례라는 점에 보람을 느낀다"며 "더 많은 한국 기업들이 브라질 특수를 누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 인터뷰- 이호 LG전자 브라질법인장 전무
"다른 기업들이 철수할 때에도 시장을 지키며 거래선과 소비자들에게 믿음을 준 것이 가장 주효했다."
이 호 LG전자 브라질법인장 전무(사진)는 LG전자가 브라질에서 '엘리제'(LG의 브라질식 발음)란 국민 브랜드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실제 1999년과 2002년 브라질이 각각 금융위기와 환율파동 사태를 겪으며 시장의 수요가 30% 이상 줄어들자 대부분의 외국 기업들은 브라질 사업을 접거나 대폭 축소했다. 그러나 LG는 브라질 시장의 성장성과 그 동안 구축한 남미 시장 교두보를 포기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이를 버텨냈다. 경쟁자가 떠난 시장에서 LG의 시장 지배력을 공고해질 수 밖에 없었다. LG전자는 지난해 브라질에서 PDP TV(시장 점유율 70.8%) LCD TV(31.4%) 브라운관 TV(26.3%) 오디오(23.9%) 홈시어터(26.5%) 등에서 모두 정상을 지켰다.
프리미엄 이미지를 구축하며 거래선과의 돈독한 관계에 오랫동안 공을 들인 것도 한 몫 했다. 현지화한 제품들을 내 놓은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축구에 열광하는 브라질 소비자 특성에 맞춰 경기를 자동 녹화해서 원하는 때 볼 수 있는 타임머신 TV는 대박을 냈다. 또 현지 직원들을 과감하게 채용, 현지인 중심의 경영을 펴면서 주재원은 본사와의 교량 역할에만 충실했다. 이 법인장은 "브라질은 무한한 기회의 땅"이라며 "고객에게 줄 수 있는 실질적 가치를 항상 찾고, 이에 맞는 제품군을 통해 승부를 걸 것"이라고 말했다.
■ 국내 기업들 앞다퉈 "가자 브라질로"
'최고급 요트와 몽블랑 만년필 및 포르쉐 자동차가 가장 많이 판매되는 나라, 자동차를 무려 80개월 할부로 구입할 정도로 소비 성향이 큰 중산층, 90만원이나 하는 최신 휴대폰을 줄을 서서 사는 젊은층….'
최근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브라질 경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집권 말기에도 지지율이 80%를 넘나드는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의 친기업 정책과 때 맞춰 발견된 매장량을 가늠하기 조차 힘든 심해 유전 등에 힘 입어 최근 브라질은 국운 상승이 하늘을 찌를 정도이다. 월드컵과 올림픽을 앞둔 인프라 투자의 과실도 달콤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따라 기회의 땅을 선점하기 위한 '브라질 러시'가 한창이다.
우리 기업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LG전자와 삼성전자는 각각 두 곳의 공장을 운영하며 가전 및 휴대폰 시장의 1,2위를 다투고 있다. SK에너지도 브라질 BM-C-8ㆍ30ㆍ32 광구의 지분을 20~40% 갖고, 원유 및 가스 탐사를 하고 있다.
또 현대차가 상파울루에서 북서쪽의 피라시카바시에 6억달러를 투자, 연산 10만대 규모의 생산 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STX는 북동부 세아라주의 주도인 포르탈레자에 조선소를 짓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동국제강도 포르탈레자에 연산 600만톤 규모의 고로 제철소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브라질 발레사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전체 투자 금액이 6조원이나 돼, 포스코와 일본 JFE스틸의 참여 여부가 관심이다. 포스코는 나미사 철광석 광산 지분도 40% 인수했다.
효성은 브라질 남부 산타카타리나 지역에 연산 1만톤 규모의 스판덱스 공장을 건설하고있다. LS전선도 브라질 지사를 추진하고 있고, 현대중공업과 두산중공업은 굴삭기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한편 200억달러의 사업비가 투입되는 브라질 고속철 사업엔 철도시설공단, 철도공사, 현대로템, 현대중공업이 참여, 중국 일본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스페인과 한 판 승부를 벌일 예정이다. 또 브라질의 최대 기업이자 국영 에너지 회사인 페트로브라스가 심해유전 개발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28척의 드릴십 입찰(220억~280억달러)에도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STX 등이 도전장을 낸 상태다.
황기상 KOTRA 무역관 차장은 "최근 브라질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이 커지며, 9월에 리우 데 자네이로에서 열릴 오일&가스 쇼엔 신청 기업들이 쇄도, 전시 공간이 모자라 텐트로 옥외 전시장을 만들 정도"라며 "지리적으로는 멀고 위험 요인들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상쇄할 매력도 큰 만큼 이제 브라질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 할 때"라고 말했다.
타우바테(브라질)=글·사진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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