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격의 상처 입은 건물이 문화공간으로…관광객 유치 '일등공신'
독일 베를린 한복판, 브라이트샤이드 광장에 위치한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1895년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1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이 교회는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받아 위풍당당하고 아름다웠던 원형을 잃었다.
전후 재건축을 하자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그대로 보존해 전쟁의 파괴적 행태를 알리자는 여론이 더 강했다. 교회 내부 천장화에 생긴 금은 시멘트로 메웠고, 교회 바로 옆에 새 교회당을 세워 평화를 염원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이 교회의 흉측한 외관은 주변의 현대식 건물들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희열과 고통의 역사를 관통한 800년 고도 베를린의 현재를 대변하고 있었다.
역사가 곧 예술이다
베를린은 역사를 품은 문화도시로의 변신을 꿈꾸고 있다. 과거의 영광과 아픔을 상징하는 건축물들이 도시 풍경을 새롭게 디자인하며 곳곳에서 관광객들의 시선을 잡는다. 흉물로 낙인 찍히기 십상인 건물이 문화공간으로 거듭나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예술적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도심 오라니엔부르게르 거리에 위치한 문화공간 '타클레스'(Tachless)는 문화도시 베를린의 생산적 모색을 상징한다. 1907년 백화점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독일의 현대사를 압축하고 있다. 유명 가전업체 AEG의 전시시설로 사용되다 나치 친위대의 회합 장소로 쓰였던 이곳은 동독 시절에는 공산당의 선전활동에 이용됐다. 폭격과 총격에 심한 상처를 입어 독일 통일과 함께 철거 대상 목록에 올랐으나, 1990년 젊은 예술가들이 점거한 뒤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그래피티로 가득한 이 5층 건물 6만㎡의 공간은 예술가 50여명의 보금자리다. 세계 각지에서 온 신진 예술가들이 100년이 더 된 콘크리트 건물에서 예술적 영감을 키워가고 있다. 타클레스의 대외협력을 맡고 있는 마르틴 라이테르는 "독일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기에 폐건물이나 다름없는 이곳을 그대로 사용한다"며 "건물은 외관보다 그 속에 담긴 역사와 진실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베를린 교외 울스타인 거리의 '우파 파브릭'(UFA Fabrik)도 잊고 싶은 과거를 껴안고 있다. 우파는 한때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영화 스튜디오였다. 1920년대 독일 영화 황금기의 상징이다. 그러나 1930년대 나치의 선전영화를 만드는 데 앞장서면서 역사에 얼룩을 남겼다. 1978년 빈 공간이 되자 진보적 젊은이들이 나서 생태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1만8,000㎡의 공간은 연간 400여 차례의 공연을 유치하는 등 문화 인큐베이터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이곳 역시 아픈 과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수리만으로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1887년 베를린의 대표적 맥주 양조장으로 건설된 도심 프뢰벨 거리의 '쿨투어 브라우어라이'(Kultur Brauereiㆍ독일어로 문화 양조장을 의미)는 문화를 중시하는 베를린 도시정책의 백미.
1978년 일찌감치 문화재로 지정됐고 통독 이후 5,600만 유로가 투입돼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영화관과 공연장, 카페, 악기판매상, 음악학원에다 당구장과 댄스클럽까지, 온갖 문화시설이 4만㎡의 공간을 채우고 있다. 'Flanschenbier-Abteilung'(병맥주 부서) 등 양조장 시절을 보여주는 벽면의 커다란 문구까지 고지식하게 유지하고 있는 이곳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건물 소유주가 나치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구동독 시절 소련군에 의해 폐쇄된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도시의 도약 이끄는 문화적 오아시스
이처럼 용도폐기될 뻔한 건물들을 활용한 베를린의 문화공간은 도시 이미지 제고는 물론, 관광객 유치에도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자칫 삭막해 보일 수도 있는 풍경이 문화적 오아시스 노릇을 톡톡히 하며 도시의 도약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쿨투어 브라우어라이를 찾는 관광객만 한 해 100만여명. 쿨투어 브라우어라이를 소유한 공기업 TLG의 마케팅 담당 올라프 빌룬은 "이곳의 가치는 경제적 수치로 평가할 수 없다"며 "시민들의 여론도 '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일무이한 장소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매년 50만여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와 예술을 즐기는 타클레스는 20년 동안 이곳을 거쳐간 세계의 예술가 10만여명을 통해 베를린의 예술적 네트워크를 다진다. 2001년부터 이곳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우크라이나인 알렉산더 로딩은 "타클레스는 세계의 젊은 작가들을 이어주는 중개자 역할을 한다. 역사적 공간이 주는 특별한 느낌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타클레스 등을 통한 베를린의 문화도시 지향은 그러나 원래는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통일 이후에도 경제 활동이 여전히 옛 ??남부지역에 몰려 있는 상태에서, 역사와 문화의 결합만이 베를린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자 무기였기 때문이다.
베를린의 연간 문화예산은 약 5억 유로. 연방정부 지원금 4억 유로를 합하면 매년 9억 유로(한화 약 1조3,500억원)가량이 도시의 문화부흥을 위해 사용된다. 문화산업과 관련한 베를린의 총생산액은 연간 약 90억 유로. 10배의 산출을 낳는 셈이다. 베를린 시 전체 연간 총생산의 21%를 차지하는 액수다. 문화가 베를린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베를린시 문화분야 대변인 토르스텐 보엘레르트 박사는 "베를린은 독일의 역사와 건축사의 중심지다. 전쟁으로 파괴된 이곳에서 지난 시절의 기억들은 현대적으로 생생하게 보존된다"고 강조했다. 과거가 현재가 되고 현재가 곧 미래가 된다는 문화적 인식이야말로, 도시의 진정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 인터뷰- '우파 파브릭' 대외협력 담당 지그리트 니메르
베를린의 '우파 파브릭'은 생태와 문화와 교육이 어우러진 이색 공간이다. 빗물을 받아 화장실에 사용하고, 건물 지붕에 흙을 덮어 풀이 자라도록 했다. 태양열을 이용해 난방을 가동하며 유기농 식재료로 빵을 만들어 판다. 3개의 공연장에서는 연중무휴 공연이 열리고, 주민들은 문화강좌를 통해 요가도 배우고 동양무술도 익힌다. 한 켠엔 교과과정에 얽매이지 않는 초등과정의 대안학교가 운영된다. 게스트하우스는 저렴한 가격에 손님을 받고 있다. 한 마디로 생활밀착형 복합 문화공간인 셈이다.
우파 파브릭의 대외협력을 담당하고 있는 지그리트 니메르는 7개의 2층 이하 키 작은 건물들로 이뤄진 이 공간을 탄생부터 지켜봤다. 불도저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우파 파브릭은 새로운 문화공간에 목말라 했던 서독 청년들이 1978년 소유주였던 베를린 시로부터 건물을 임대하면서 다시 태어났다.
니메르는 "우파 파브릭은 문화, 예술, 경제, 사회 네 측면이 복합적으로 융화되는 공간을 꿈꿨다"며 "그 이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초창기에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우파 파브릭의 성장을 도모했다. 임대계약서로 담보대출을 받아 서커스단도 만들고, 카페를 운영해 조금씩 번 돈으로 이곳을 가꿔왔다. 당시 참여자들 대부분이 무보수로 자발적으로 일했는데, 이 공간의 문화적 변신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과 기대감 자체가 우리를 기쁘게 했다."
그들의 기대대로 30여 년의 세월이 지나 우파 파브릭은 베를린의 문화적 아이콘이 됐다. 지금은 200명의 직원이 근무하면서 매년 20만명의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니메르는 "돈 한 푼 없이 이룬 성과가 스스로 생각해도 참 놀랍다"고 말했다.
그는 "공간을 최대한 옛 모습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옛 구내식당을 개조해 만든 공연장은 문 하나를 새로 달아도 1930년대 풍의 디자인을 고집한다. 영화 시사실이었던 곳은 공연장으로 용도가 바뀌었을 뿐 80여년 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우파 파브릭은 1930년대 나치 선전영화 제작으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다. 그런 잊지 못할 역사적 배경이 있기에 건물을 부수자는 의견도 많았다"는 그는 "그러나 아무리 나쁜 역사라도 우리에게 속한 것이다. 그것을 없애면 우리의 정체성과 뿌리가 흔들리기에 옛 상태를 유지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며 살아가야 한다. 만약 옛 건물들을 다 쓸어냈다면 지금 같은 문화공간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과거에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 국내 사례- 중앙청·소래철교 등 철거
베를린이 역사적 가치를 중시하며 문화도시의 품격을 갖춰가고 있다면 한국의 도시는 그 반대편에 서 있다. 현대적 반달리즘(vandalismㆍ문화 파괴 행위)이라는 지적이 나올 만큼 특정 공간에서의 과거 지우기, 역사 숨기기가 비일비재하다.
1995년 중앙청 철거가 대표적이다. 1916년 일제의 조선총독부 청사로 지어진 이 건물은 미군정 당시 군정청을 거쳐 대한민국 건국 이후 정부 부처의 상주 공간으로 활용되는 등 70여년 동안 한반도 권부의 심장을 상징했다. 1986년 중앙박물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으나 문민정부가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우면서 지상에서 그 형태가 사라졌다. 당시 오욕의 역사를 상징하는 이 건물을 통해 과거의 아픔을 상기해야 한다는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지만, 민족 정기를 앞세운 정부의 강행 의지와 철거 찬성 여론을 막지는 못했다.
지난 2월 폐쇄된 인천 소래철교도 실용적 기능을 상실한 옛것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홀대를 드러낸다. 1937년 경기 시흥시와 인천 소래포구를 이으며 모습을 드러낸 길이 126.5m의 소래철교는 1995년 수인선이 모두 철거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매년 100만 명이 시흥시 쪽에 주차를 해놓고 소래철교를 도보로 건너 소래포구를 찾으면서 철교는 명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흥시가 주차 문제를 거론하며 철거를 요구했고,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소래철교는 개통 73년 만에 폐쇄됐다. 국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남은 협궤선 철교의 최후기 임박한 것이다.
베를린= 글·사진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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