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발견된 삼국시대 비석은 몇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가운데 특히 고구려비는 남한에는 중원고구려비가 유일하다. 고구려 영토였던 중국의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비는 높이 6.5m에 달해 웅장하고 네 면에 새긴 글자 역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 광개토대왕 비만큼 웅장한 고구려비는 지금까지도 발견된 예가 없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충북 충주시 관할 지역에서 고구려비가 우리의 눈앞에 등장했다. 바로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다. 31년 전인 1979년 2월 24일(토) 이었다.
경위를 보면 비가 발견되기 전 해인 1978년 유창종(柳昌宗) 검사(현 유금와당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회 회장)가 충주지청으로 부임하게 된다. 유 검사는 평소 옛 기와에 관심이 많았다. 마침 당시 충주 북여중 장준식(張俊植) 국사교사(현 충청대학교 교수)와 중원군 문화공보실 김예식(金禮植) 실장 등이 주말이면 충주 일대의 폐사지 등으로 기와 채집을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이 3인이 주축이 되어 5인의 멤버로 예성동호회(蘂城同好會)라는 모임을 만들고, 주말이면 기와 수집 등 유적답사를 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79년 3월 2일자로 유 검사가 의정부지청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답사 활동은 많이 하고 있었지만 모임의 기념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그래서 2월 24일(토) 유검사송별기념 답사와 함께 모임의 사진을 마련하기 위해 가금면에 있는 중앙탑(국보6호)과 주변의 유적을 답사하게 되었다. 먼저 중앙탑에서 기념촬영을 마치고 이어 하구암리에 있는 석불입상 등을 답사하기 위해 용전리 입석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선돌 즉 입석이 있어 마을이름이 입석리가 되었지만 이 입석은 그저 마을 입구에 서있었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비로 나름 신성시 되어 왔다.
그런데 이 날 우연히 이 입석을 한 번 더 관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지금까지 단순한 입석으로 알고 있는 선돌에 희미하나마 글자가 새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중원고구려비가 우리 앞에 그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 높이 1.4m에 지나지 않지만 역시 네 면에 모두 글자를 새겨 마치 광개토대왕비의 축소판을 연상하게 한다. 오랜 세월 마멸되어 판독이 어려운 글자가 많지만 내용은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한 것으로 장수왕이 5세기 전반 남한강 유역을 공격하여 개척한 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는 당시 고구려, 신라, 백제 3국 관계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1981년 국보 205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최초의 위치에서 약간 옮겨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원래 비를 세운 받침 즉 대좌(臺座)가 있었을 것이지만 알 길이 없다. 비석의 글자가 많이 마멸된 원인이 마을에서 빨래판으로 사용해왔기 때문이라고 잘못 알려져 온 것은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