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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19> 1980년대 소지식인의 길-행간의 의미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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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19> 1980년대 소지식인의 길-행간의 의미 만들기

입력
2010.06.08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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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봄 어느 날 아침, 신문사에 출근했더니 100여 명이 넘는 기자들 책상이 펼쳐져 있는 편집국이 무거운 침묵 속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냐고 선배 기자에게 물었고, 선배 기자는 말없이 주먹을 내밀어 엄지 손가락을 밑으로 가리켰습니다. 저는 그만 말문을 잃었습니다. 지리한 유신시대가 끝나고 한국사는 이제 다시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저는 부산시청 내에 설치된 계엄사 보도처에 출입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일차 조판된 신문 대장을 들고 가 군 검열관의 사전 검열을 받아오는 일이었지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잉크가 채 마르지 않는 신문 대장을 들고 계엄사 보도처에 갑니다.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소령 중령들과 반가운 척 인사를 나누고 신문 대장을 들이댑니다. 검열관들은 붉은 사인펜으로 기사며 제목을 죽죽 그어 나갑니다. 그러면 저는 호들갑을 떨면서, "안소령, 이 정도는 괜찮아" 그러면서 일부러 친한 척 합니다. "군중 데모 기사는 나갈 수 없다니까." "아니, 이건 필리핀 마닐라 시에서 일어난 시민 데모 아니야." "필리핀에서 일어난 데모기사를 왜 실으려고 해? 내가 당신네들 속셈을 모를 줄 알아" 이런 식으로 어떻게든 기사를 살려 내려는 기자와 불온한 기사를 막아 내려는 검열관 사이의 갈등은 매일 치르는 신경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가관인 사태가 일어납니다. 오후 늦게 퇴근을 앞두고 참으로 불쾌한 내용이 신문사 내에 전달됩니다. 오늘 저녁 학생 데모대가 신문사를 습격할 것이라는 전달사항입니다. KBS 부산 지사 앞에서 보도 차량이 불타 엎어지고, 시내 중심가에 있던 국제신문 고층빌딩 유리창이 상당수 박살 납니다. 제가 근무하던 신문사는 그 튼튼한 철제 셔터가 찌그러집니다. 기자들은 학생 데모대의 습격을 피해 으슥한 골목 술집에 모여듭니다. 그곳에서 밤새 나름의 우국론(憂國論)이 펼쳐집니다. 왜 우리는 양쪽에서 날아오는 돌을 맞아야 하는가?

이윽고 광주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부산일보 사진부차장은 카메라를 점퍼 속에 감추고 광주에 잠입하다가 시민군에게 붙들린 무용담을 들려줍니다. 광주에 관한 모든 보도는 통제됩니다. 학생들의 데모는 더욱 격렬해지면서 오후 6시 퇴근층이 합류합니다. 지포 라이터를 최대한 크게 불 지펴 들면 그대로 횃불이 되어 부산 시가지를 누빕니다. 부산시청 앞 대로에 계엄군의 탱크가 진입하고, 로마병정처럼 중무장한 계엄군이 방패를 앞세우고 방어벽을 확보합니다.

"젊은 기자들은 신문사에 처박혀 있지 말고 역사의 현장으로 나가라!" 저희 데스크였던 이창우 편집 부국장이 결연한 지시를 내립니다. 이제 막 견습 딱지가 떨어진 젊은 기자들은 일찍 퇴근하여 시위 대열에 합류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기자란 객관적 신분 때문인지 입장들이 어정쩡해집니다. 남포동 입구에서 진압 경찰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저는 엉겁결에 "나는 기자요!" 소리칩니다. "때리지 마라 기자는 때리지 마!" 그렇게 위기를 모면한 저는 참 비겁한 회색분자라는 자괴심에 빠져듭니다

국제신문은 1면 머릿기사로 "삼라만상에 비가 내린다."는 상징적인 제목을 통 컷으로 내 보내면서 폐간을 고합니다. 부산일보는 7면 사회면 톱으로 난데없이 기상도(氣象圖)를 크게 내 보내면서 "오늘 날씨 전반적으로 흐림" 이란 또 다른 상징적인 기사를 싣습니다. 암울한 시대 행간의 의미를 통해서라도 역사 현실적 진실을 전달하려는 기자들의 상상력은 어김없이 검열의 그물망 속에 포착됩니다. 기상도를 사회면 톱으로 내보낸 부산일보 편집부 김형석 차장은 필화 사건의 주범이 되어 사표를 던집니다. 그는 바로 13년 전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신문사에 입사한 유일한 기자였고, 저의 편집부 사부였습니다. 제가 제목을 달아 가면, " 자네 지금 시를 쓰는가. 신문사적 언어는 시가 아니야." 그러면서 제가 단 제목을 사정없이 지워버리던 무서운 선생이었습니다. 국제신문 변노섭 논설위원은 그 당시 젊은 기자들에게 의로운 논객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분은 목이 굳어버렸고 척추가 마비된 상태로 논설을 계속 쓰셨습니다. 유신 시대 그가 쓴 글 때문에 붙들려 가 고초를 당한 흔적이 그대로 육체의 징표로 남은 것입지요.

저는 그 당시 부산대학교 영문학과에서 주최하는 문학 서클에 초대를 받습니다. 시인 자격으로 초대 받은 자리에서 한 학생에게서 공개적인 힐난성 질문을 받습니다.

"지금 신문사 기자들은 얼마만큼 진실을 보도하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시대를 증거하는 지식인일 수 있습니까?!"

저는 울분을 꾹 눌러 앉히며 차분해 지려고 하는데도 턱이 덜덜 떨리는 흥분 상태로 대답합니다.

"여러분은 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붙들려 가도 곧 풀려 나옵니다. 학생은 대학이란 집단의 힘과 배경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나오면 영예로운 투사의 이력을 달기도 하지요. 일반 직장인들은 자신의 직업적 전문성을 방어벽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는 교수이니까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본질이고, 나는 의사니까 의술을 펴는 것이 내 본분이다 그러면서 이 야만적인 상황과 직접 대면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는 지금 이곳의 현실을 매일 글로 써 내어야 하는 상황의 최전선에서 일합니다. 그들은 정치적 배경이나 대학 같은 집단적 방어벽도 없습니다. 그들은 시대를 논하는 지식인들이기 이전에 직장인이고 소시민일 뿐입니다. 그들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검열의 기준을 피할 수 있는 행간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곳 한국사회에서 신문기자만큼 통제 당하고 억압당하고 급기야 직장을 잃고 길거리로 쫓겨나는 직업인이 있다면 어디 한번 대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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