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에 착수한 지 13년, 출간 작업에만도 4년여가 걸린 대장정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춘추(春秋)' '사기(史記)'와 함께 중국 3대 역사서로 꼽히는 사마광(司馬光ㆍ1019~1086)의 '자치통감(資治通鑑)' 294권이 32권(해설서 1권 포함)의 우리말 번역으로 완간됐다. 쪽수로 따지면 1만9,566쪽, 200자 원고지 8만여매에 달하는 거질(巨帙)이다. 번역자가 단 각주만 4만5,000여 개. 원저가 완성된 1084년 이래로 1,000년 가까운 역사 동안 중국 이외 국가에서 '자치통감'이 완역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엄청난 번역과 출간을 가능케 한 것은 정부 기관이나 학술 관련 공공 단체가 아니었다. 퇴직금을 털어 직접 출판사를 차리고, 그것도 모자라 은행 빚까지 지면서도 무릎 꿇지 않았던 한 학자의 집념이었다. '필생의 역작'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권중달(69) 중앙대 사학과 명예교수. 8일 서울 봉천동 전철역 인근의 10평 남짓한 오피스텔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제 할 일을 한 것"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그 감회를 무엇에 견주랴마는, 백발의 학자는 "여여(如如)합니다"라며 담담했다.
북송시대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사마광이 20년 간 매달렸던 '자치통감'은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송나라 건국 직전까지 1,36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장대한 통사다. 송 신종(神宗)에게 바쳐진 이 책은 '정치를 하는데 밑천이 되는 통시대적인 거울'이란 뜻의 책 이름대로 용병과 치세 등을 담은 '제왕학의 교과서'이자, 2만여개의 사건과 16개 왕조의 흥망성쇠를 통해 인간관계의 삼라만상을 아우르고 있는 세상살이의 보고다. 마오쩌둥은 대장정 중에도 '자치통감'을 휴대하며 생애 17차례나 통독했다 하며, 훗날 직접 '자치통감 평석'을 쓰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종대왕이 '자치통감 훈의'를 편찬하는 등 사대부의 필독서로 꼽혔다.
출간 과정에 대해 권 교수는 "선학들에 비하면 제가 겪은 어려움은 명함조차 내밀기 어려울 것"이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13년의 세월이 그런 겸양으로 갈무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석사와 박사학위 논문을 모두 '자치통감'을 주제로 썼던 그가 완역 작업에 뛰어든 것은 1997년. 10년간의 보직교수 생활 뒤 학문 인생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였다. 2002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번역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는 기회도 잡아 제자들과 함께 번역팀을 꾸려가며 2005년말 완역 초고를 완성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방대한 분량의 책을 선뜻 출간하겠다는 출판사가 없었던 것. 그에게 완간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은 자비 출판밖에 없었다. 비용은 2006년 1월 퇴직하면서 받은 퇴직금이었다. 부인이 출판사를 차렸고 딸이 실무 진행을 맡았다. 2007년부터 6개월마다 4권씩 책을 펴냈는데, 판매 수익금으로 출간을 이어가겠다는 요량은 빗나갈 수밖에 없었다. "수금이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었다. 결국 은행 대출로 메울 수밖에 없었던 권 교수는 그러나 "손해 좀 보면 어때요. 후학들이 이 책을 보면서 큰 도움을 받으면 족하다"며 "약속된 기한에 책이 나오지 않으면 출판사로 전화해 독촉하는 독자들도 적지 않았는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원서로 '자치통감'을 완독하려면 3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원서를 완독한 이도 드문 게 현실. 특히 원서가 디지털화되면서 키워드를 입력해 필요한 부분만 읽는 소위 '색인(索引) 연구'로 논문을 쓰는 게 요즘 학계 풍토라고도 한다. 권 교수는 "학계가 화석화된 역사 지식만 공급하는 실정인데, 역사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 사회의 큰 물줄기를 읽는 것"이라며 "그러기 위해선 '자치통감'을 꼭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치통감'은 기록을 위해 만들어진 백과사전식 역사서가 아니라 황제의 독서를 위해 만들어진 까닭에 읽기에도 편하고 좋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이번 완역본이 한국 문화산업의 콘텐츠 확대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책에 등장하는 2만여개의 사건과 무수한 인물들은 드라마나 영화를 만드는 이들에게도 무궁무진한 소재가 될 이야기의 광맥입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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