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람들은 영화 대본을 의미하는 용어로 시나리오(Scenario)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씨나리오'든 '싸이나리오'든 같은 철자의 영어 단어가 허용하는 어떤 발음으로 말해도 미국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미국인들에게 시나리오는 영화와는 무관한 어떤 계획을 뜻하는 보통 명사이다. '쿠테타 시나리오'나 '경제 회생 시나리오' 등이 그 예이다.
영화의 각본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스크린플레이(Screenplay)이다. 연극의 대본이 스크린, 즉 영화에 적용된 것을 뜻하는 의미로 영화의 발명과 함께 만들어진 합성어이다. 그러나 이 용어보다 영화 산업 종사자들이 더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는 스크립트(Script)다. 한국의 영화계에서 시나리오를 흔히 '책'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영화각본 형식 나라마다 달라
시나리오라는 말은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다. '코메디아 델 아르떼'라고 불리는 즉흥 희극의 대본을 뜻하는 말이었다. 즉흥 희극이니, 배우의 동작과 대사가 꼼꼼히 기록되어 있기보다는 대략적인 장면의 시작과 끝, 중심 사건 정도를 간략히 적어 놓은 것들이었다. 19 세기 말 영화가 발명되면서 이 용어는 바로 영화에 적용되었다. 즉흥극의 용어가 적용된 이유는 초창기 영화가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서사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다큐멘터리적인 간단한 상황을 찍어 보여줬기 때문이다.
영화가 스토리를 도입하면서 영화의 이야기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용어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칸 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의 가 받은 각본상의 이름도 불어로는 '시나리오 상'이다. 물론 수상 결과를 보도하는 미국의 신문들은 '베스트 스크린플레이 상'으로 번역한다. 한국의 영화계가 이 시나리오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은 초창기 유럽의 영화 용어들을 일본을 통해서 수입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미국의 영화 산업은 스크린플레이, 즉 각본에 상당히 엄격한 형식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3 장 구조를 기본으로 하는 표준적인 이야기 구조가 작가들에게 요구된다. 뿐만 아니라 장면의 제목, 지문, 인물의 이름, 대사의 위치 등에서도 표준적인 레이아웃이 요구된다. 심지어 제본의 형태까지도 A4 용지를 철 핀 3 개로 묶은 것이 일반적이다. 모든 것을 산업적 표준에 맞추려는 미국인들의 성향이 보인다.
반면에 유럽의 각본, 즉 시나리오는 자유스런 형식을 보인다. 미국의 각본 같은 형식을 지키는 것도 있지만, 영국의 마이크 리 감독처럼 장소와 장면의 주제만을 적어놓는 것도 있다. 소설처럼 쓴 것도 있고, 아주 간단한 트리트먼트 수준의 것들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있다. 일본의 각본들은 형식적으로는 미국적 방식을 지키고 있지만 지문을 아주 간결하게 쓰고, 짤막한 대사를 중심으로 쓴다는 것에서 차이가 난다.
0점 받은 이창동의 '시' 시나리오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시나리오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화진흥위원회 심사에서 한 심사위원에게 0점을 받았다고 한다.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는 말은 장소와 지문, 대사가 분리된 레이아웃의 형태를 지키지 않고 소설처럼 풀어서 서술했다는 것일 것이다. 영화 각본의 형식은 시대마다, 나라마다, 그리고 작가마다 달라져 왔다.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이 있다면 각본은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된 영화라는 궁극적 결과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런 만큼 레이아웃이 아니라 그 계획의 수준이나 타당성을 기준으로 평가 받는 것이 온당하다.
의 각본을 직접 본 관객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감동 받은 많은 관객들은 '좋은 각본 없이 좋은 영화는 없다'라는 한국 영화 산업의 오래된 격언을 상기할 것이다.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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