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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 반세기/ 느낌표로 남다… 감동과 격동, 역사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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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 반세기/ 느낌표로 남다… 감동과 격동, 역사의 순간들

입력
2010.06.0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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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슬 퍼런 유신체제도 보도 지침 군사정권도 막지 못했던 기자정신

1970~80년대 대한민국 언론 암흑기에도 한국일보는 유신체제와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국내 언론계의 분위기를 선도했다. 특히 5공화국 시절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한 사건과 제3공화국 시절 유신체제의 언론통제에 대한 집단적인 거부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군사독재의 서슬이 아직 퍼렇던 1986년 당시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는 85년 10월 19일부터 86년 8월 8일까지 문공부 홍보정책실이 각 언론사에 시달한 584개항의 보도지침 내용을 한국일보가 보관 중이던 자료철에서 복사해 민주언론운동협의회에 넘겨줬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민언련에서 발간하는 격주간 지가 86년 9월 6일 특집호를 발간해 정부의 언론통제 실상을 알렸다. 한국일보가 단초를 제공해 군사정권의 언론탄압이 세상에 처음 공개된 것이다.

이 일로 김 기자가 그 해 12월 17일 구속되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종교ㆍ시민단체들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까지 나서 석방을 촉구했다. 한국일보도 김 기자의 변호사를 직접 선임하는 등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에 나섰다. 결국 김 기자는 87년 6월 3일 징역 8월,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72년 10월 17일 들어선 유신체제 아래 언론통제가 심해지면서 한국일보 편집국 기자들은 유신 선포 후 처음으로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철야농성을 73년 11월 7일 벌인다. 이어 유신선포 후 1년간의 침묵을 만회하려는 듯 22일에는 언론자유 확립을 결의한다.

편집국에서 기자 150명이 박수로 통과시킨 '언론자유 확립 결의문'은 말 그대로 '언론이 부당한 간섭 등으로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사태를 중시하고 시정하기 위해 적절한 행동에 나선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한 달 후 한국일보 기자들은 약속을 지켰다. 73년 12월 29일 1,3면에 '언론자유가 세계 도처에서 침식되고 있다'는 국제신문협회(IPI)의 연례보고서를 상세히 소개한 것이다. 당시 그 지면배정은 지금도 용기 있는 행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

■ 개발독재의 그늘, YH 여공 강제해산 연이틀 나홀로 보도

문무대왕릉 발견과 동강댐 건설 백지화 등 앞서 살펴본 특종 이외에도 수많은 걸출한 단독기사들이 한국일보 56년 지면을 장식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 정치권력에 당당히 맞섰던 YH사건 보도와 2000년대 들어 또 다른 권력으로 대두된 경제권력의 밑바닥까지 파헤친 SK글로벌 1조원대 분식회계 사건 보도는 한국일보만의 기자정신을 잘 보여줬다.

1979년 8월 9일 서울 면목동에 있던 가발 봉제업체 YH무역 생산직 여성근로자 170여명이 사측의 폐업공고에 반발하며 서울 마포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것으로 시작된 YH사건.

당시 이 사건에 야당과 재야인사들의 격려가 이어지며 정치문제로 비화하자 경찰은 이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 종업원이 동맥을 끊고 4층 창문에서 뛰어 내려 숨지고 취재기자들도 폭행을 당했다. 한국일보는 이 사건을 8월 11일과 12일자 1면에 단독으로 기사화했다.

미 국무성은 보도 이틀 뒤인 14일 이례적으로 "여성근로자의 강제해산이 경찰의 과도한 대응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명백하다"는 논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건도 2003년 2월 28일 한국일보가 단독 보도했다. 이 사건은 SK글로벌이 2001회계연도 이전부터 부채를 제대로 회계에 반영하지 않아 1조4,000억원 정도의 빚이 없는 것처럼 장부를 조작해온 사실을 서울지검이 밝힌 것이다.

한국일보의 SK글로벌 비리사건 보도는 경제권력에 굴하지 않고 맞서는 기자정신을 보여주며 권력 비판과 감시라는 언론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 보도는 대선자금 수사의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86년 에이즈 양성 첫 내국인 격리사건과 88년 새마을 비리 수사 도중 전경환씨의 일본 도피성 출국, 2003년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은닉재산이 수백억원대라는 것을 캐낸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단독 보도였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양길승 청와대 부속실장 향응 비리사건 보도 등도 권력에 맞서는 한국일보 특유의 기자정신을 잘 드러낸 기사들이었다.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

■ 쉼표는 없다… 현장 향한 열정, 사실 향한 집념

▲ 최규선·진승현 게이트… 권력 비리마다 최초 보도

1972년 6월 닉슨 미 대통령의 재선을 노리던 비밀공작반이 워싱턴 서쪽 워터게이트빌딩의 민주당사(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 체포된 워터게이트 사건. 이 사건이 발단이 돼 닉슨 정권의 선거방해, 정치헌금 부정 수뢰, 탈세 등 정권의 각종 비리가 드러났다. 파문은 커져갔고 74년 8월 대통령탄핵결의가 가결돼 닉슨은 결국 대통령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 정권이 개입된 부패ㆍ비리 사건을 '워터게이트 사건'에 빗대 '000 게이트'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사건기사, 탐사보도에 강한 한국일보는 감시의 눈을 부릅뜨고 정권이 관련된 부정ㆍ부패를 철저히 살폈다.

2000년대 들어 진승현ㆍ이용호ㆍ최규선ㆍ윤창렬 게이트 등에서 건져 올린 연속 특종은 한국일보의 이러한 저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불법 대출과 주가조작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한 진승현씨가 권노갑 전 국회의원, 김은성 국가정보원 차장 등 국민의 정부 당시 정ㆍ관계 실세들에게 로비를 했다는 사실을 밝혀 냈고, G&G구조조정 이용호 회장의 주가조작 과정에 검찰 고위층 및 국세청, 국가정보원, 정치권 등 권력기관의 핵심인사 상당수가 개입돼 있다는 의혹을 제기, 대검찰청에 '특별감찰본부'라는 새로운 조사팀이 꾸려지도록 만들기도 했다.

2002년 3월 8일 최규선 미래도시환경 부사장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세상에 처음 폭로했고, 검찰 수사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인 홍걸씨가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 구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특종 보도들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해 오직 독자만을 주인으로 섬긴다'는 창간 정신이 지면에 충실히 반영된 결과였다.

▲ "줄기세포 현재는 없다" 황우석 논란 마침표 동강댐 백지화

"인간의 체세포 배아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했다."

2004년 당시 황우석 서울대 교수 연구팀의 발표에 세계는 깜짝 놀랐다. 이듬해인 2005년 환자 체세포를 이용한 맞춤형줄기세포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 황 교수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불치병 환자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한 듯 그를 '국민 영웅'으로 떠받들게 됐다.

그 해 11월 MBC PD수첩이 황 교수팀 일원이던 김선종 연구원의 제보를 바탕으로 배아줄기세포가 가짜라는 의혹을 보도했고 이후 배아줄기세포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게 일기 시작했다. 일부 방송과 신문들이 추측성 보도를 남발하고 국익 논쟁까지 겹치면서 시간이 갈수록 혼란은 더욱 거세졌다.

한국일보는 그러나 냉정을 유지하며 관련 의혹들을 차근차근 풀어가기 시작했고 2005년 12월 16일자 1면에서 황 교수가 세계적인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게재한 논문이 허위라는 내용의'줄기세포 현재는 없다'기사를 보도했다. 국민을 혼란에 빠트린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었다. 이후 한국일보는 소장 과학자들이 제기한 논문 사진 중복 의혹 등 팩트(fact)를 집요하게 추적, 서울대의 논문 재검증 결정 등의 성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서울대 조사위원회는 "줄기세포가 없다"는 발표와 함께 황 교수 등 6명을 검찰에 고발했고 1심 재판부는 기소 3년4개월여 만인 지난해 10월 논문 조작 혐의를 인정, 황 교수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 97년 대선 직전 'DJP 단일화' 비밀회동 단독 취재

15대 대선을 앞둔 1997년 11월 3일. 김대중(DJ) 당시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JP) 자민련 총재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었다. '야권 단일화 합의문'에 최종 서명한 직후였다. 양당 관계자 500여명의 환호와 박수소리로 의원회관은 떠나갈 듯 했고, 양김(金)은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려 이에 화답했다. DJP 단일화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날이었다.

한국일보는 이에 앞서 DJP 단일화 성사 소식과 구체적인 내용을 지면을 통해 상세하게 보도했다. 양당간 물밑 협상이 한창일 무렵, 한국일보는 10월28일자 1면'김대중-김종필씨 전격회동'이라는 머리기사에서 전날 저녁 김대중 총재가 김종필 총재의 청구동 자택을 비밀리에 방문해 단일화 협상을 매듭지었다고 처음으로 알렸다. 김대중 총재가 단일후보가 되고 김종필 총재가 조각(組閣)권을 가진 공동정권의 국무총리를 맡기로 했다는 등의 합의문 내용도 전했다. '2년여 협상, 마침표 찍기'라는 분석기사를 통해 전격 비밀 회동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진단하고 합의문 작성 과정 등 이면에 감춰진 뒷얘기도 자세하게 실었다.

1992년 민주화 운동의 평생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에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지만 신당 창당 후 'DJP 연합'을 통해 여야간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계기가 된 역사적 현장.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대세론을 꺾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의 내막이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 생생하게 기록된 것이다.

▲ '위안부' 캄보디아 훈 할머니 50년 만에 고국품으로

"내 이름은 나미입니다. 혈육과 고향을 찾아주세요."

경남 진동에서 태어나 18세 때인 1942년께 부산항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뒤 캄보디아에 머물던 훈 할머니. 그의 존재는 시장조사를 위해 프놈펜 북부 콤퐁 참에 들렀다가 우연히 할머니를 만난 약재상 황기연씨에 의해 밝혀졌다.

97년 외신을 통해 훈 할머니의 소식을 접한 한국일보는 76일간 캄보디아 프놈펜과 지방을 오가며 끈질긴 취재를 펼쳤고 수많은 특종과 속보를 쏟아내며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훈 할머니는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본지 이희정 기자를 만나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여자를 만났다"며 얼굴을 어루만지고 손을 쓰다듬으며 반가워했다. 취재를 통해 확보한 진동 마을 전경, 진동공립보통학교 졸업식 사진을 보고서는 "진동이 맞다. 동창 얼굴도 기억난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보도 이후 외무부는 사실관계를 확인하도록 주 캄보디아 대표부에 지시했고 훈 할머니는 50여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또 대검찰청의 유전자 감식을 통해 고향과 가족, 한국이름 '이남이'까지 되찾는 감격을 맛볼 수 있었다.

캄보디아 생활을 정리하고 98년 5월 1일 영주 귀국한 훈 할머니는 한동안 경북 경산에 머물렀지만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데다 가족이 그리워 캄보디아로 다시 돌아갔고, 2001년 2월 15일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 동강댐 백지화 이끌어 낸 '동강을 살리자' 시리즈

강원 평창군 오대천과 정선군 조양강이 합류해 흐르는 동강(東江). 동강할미꽃 등 미기록종을 포함해 각종 희귀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寶庫)로 알려진 동강에는 천연기념물 260호인 백룡동굴 등 천고의 신비를 간직한 천연동굴이 곳곳에 남아있다.

정부는 1991년 4월 이곳에 높이 98m, 길이 325m, 저수량 6억9,800만톤 규모의 영월 다목적댐(일명 동강댐)을 짓는 계획을 발표했다. 물 부족 시대 대비, 홍수예방 차원이라는 명목이었다. 환경보전론자들을 중심으로 거센 반대 여론이 일었고 정부 내에서도 건교부와 환경부가 이견을 보이는 등 곳곳에서 마찰이 생겼다.

한국일보는 한 발 앞선 기획, 동강댐 총점검 시리즈 '동강을 살리자'를 내보냈다. ▦여론조사와 현지르포 ▦생태계, 그 신비와 실태 ▦메아리 없는 정선아리랑 ▦동강댐은 안전한가 ▦동강을 위한 대안 등 5회에 걸친 심층 분석 기사를 통해 국민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환경 등 삶의 질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시리즈 기사를 계기로 수많은 사회적 논의가 오갔고 2000년 6월 5일 환경의 날을 맞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동강댐 건설 백지화 방침을 밝혔다.

정부 정책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기사는 자연환경을 살린 일등 공신으로 평가 받았다. 그 결과 '동강 특별취재팀'은 서울언론인클럽이 제정한 제15회 언론상 기획취재상을 수상했다.

▲ 광복 후 최대 문화사적 사건, 문무대왕릉 발견

1967년 5월 16일자 '경북 월성군 봉길리 앞바다 대왕암은 문무대왕릉'이라는 제목의 1면 톱 특종은 문무대왕릉의 존재를 확인, 세상에 처음 알린 쾌거였다. 한국일보가 창간 10주년을 기념해 벌인 '신라 학술 조사사업'의 성과였다.

한국일보는 64년부터 3개년 계획으로 신라시대 다섯 명산(신라五岳)에 대한 학술조사에 나섰다. 고대사 유적에 대한 종합 학술조사 사업은 당시 언론계뿐 아니라 학계에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상백 서울대 교수 등 학계인사들과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 등으로 꾸려진 '신라五岳 조사단'은 65년 태백산 자락에서 동양 최대의 반가사유석불(半跏思惟石佛)을 발견하는 등 국보급을 포함, 모두 147점의 귀중한 문화재를 새로 발굴해내는 성과를 거뒀다.

67년엔 해방 이후 최대의 문화사적 업적을 남기게 된다. 그 해 5월 15일 당시까지 실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던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을 경북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의 대왕암(大王岩)에서 발견한 것. 대왕암은 경주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30㎞ 떨어진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는 둘레 200m 정도의 바위 섬인데 조사단에 의해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릉임이 공식 확인됐다.

당시 조사단을 수행한 남욱 문화부장과 우병익 경주 주재기자는 '광복 후 최대의 문화재 수확-문무대왕릉 발견'제목의 기사를 통해 발굴 당시의 상황과 역사적 의미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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