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는 많은 일화를 남긴 사람이다. 황희는 1363년(공민왕 12)에 개성에서 태어나 1389년(창왕 1)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했다. 그러다가 주위에서 황희같이 젊고 유능한 사람은 백성을 위해서 나가서 벼슬해야 한다고 해 태종 때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1418년(태종 18) 양령대군을 폐하고 충령대군을 세자로 세우려는 것을 반대하다가, 교하(交河)-남원(南原)으로 귀양갔다. 그러나 61세에 세종의 부름을 받고 올라와 65세에 영의정이 된 후 18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 그는 행정의 달인이요, 덕치의 명수였다. 그가 덕이 높았음은 그에 관한 여러 일화가 증명한다.
가장 잘 알려진 일화는 두 여자종의 싸움을 판결한 일이다. 한 계집종이 이러저러해서 자기는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고 했다. 그 말이 옳다고 했다. 이번에는 다른 계집 종이 이러저러하니 자기는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고 했다. 역시 네 말이 옳다고 했다. 이 말을 듣던 부인이 재판을 하려면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해야지 다 옳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부인의 말도 또한 옳다고 했다.
또한 친구가 맡긴 어린 종이 똑똑해 몰래 돈을 주어 풀어주었더니 그 아이가 황희가 시관인 과거에 급제했다. 그 아이가 이실직고(以實直告)하려 하자 황희는 큰 소리로 다른 얘기를 하면서 말을 못하게 해 비밀을 지켜 주었다 한다.
이처럼 후덕한 황희지만 유독 김종서에게만은 엄격했다. 김종서가 6진(六鎭)을 개척하고 갓 병조판서가 되었을 때였다. 하루는 영의정인 자신 앞에서 교의(交椅)에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이에 황희는 하인에게 "병조판서가 앉은 교의의 한 쪽 다리가 짧은 모양이니 얼른 나무토막을 가져다 괴어드리라"고 했다. 김종서가 깜짝 놀라 흙바닥에 내려와 엎드려 사죄했다. 김종서는 "여진족을 정벌할 때는 적장이 쏜 화살이 날아와 책상에 꽂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는데, 황정승에게 혼이 날 때는 등에 식은땀이 난다"고 했다고 한다.
한번은 김종서가 공조판서로 있을 때 공조에서 대신들에게 술과 과일을 대접하자, 황희가 대노해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를 의정부 옆에 둔 것은 3공(三公)을 대접하라는 것인데, 사사로이 공조에서 음식을 작만해도 되느냐?"고 나무랐다. 맹사성(孟思誠)이 "김종서는 능한 사람인데 대감께서 왜 그렇게 허물만 잡느냐?"고 물었더니, "내 뜻을 모르겠소? 이는 내가 김종서를 아껴서 사람을 만들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오. 김종서는 성격이 고매하고 기운이 날쌔 일을 과감하게 처리해 뒷날 우리 자리에 앉을 것이오. 그러나 그 때 신중하지 않고 자만하면 일을 그르칠까 염려스러워 내가 일부러 경계해 오만한 기운을 꺾으려는 것이오"라고 했다고 한다. 세종이 세손(단종)을 위탁하려 하는데, 황희는 이미 90 고령이라 김종서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황희는 이 때를 내다보고 인재를 길렀던 것이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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