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이맘때 '근원적 처방'을 화두로 꺼내들었다. 한나라당이 4ㆍ29 재ㆍ보선에서 참패한 충격으로 여권에서 국정 운영기조 전면 전환과 대대적인 당ㆍ정ㆍ청 인적 쇄신 주장이 터져 나오고 결국 여당에 쇄신특위가 구성돼 쇄신안을 만든다고 법석을 떤 뒤의 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따른 조문정국의 여진도 계속되던 때였다.
6·2선거, 친서민 중도실용에 찬물
6월 중순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출국하는 날 아침의 주례 라디오연설에서 이 대통령이 이 말을 꺼낸 맥락은 이랬다. 지금 우리 안을 들여다보면 민심은 지역과 이념으로 갈라져 있고 권력형 비리와 부정부패는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상대가 하면 무조건 반대하고 보는 정쟁의 정치문화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요즘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있다, 이런 고질적인 문제에는 대증요법보다 근원적 처방이 필요하다, 청와대 안팎에서 많은 얘기를 듣고 있으니 국민 여러분도 지혜를 모아달라….
이에 대해 당시 개헌이나 선거구제 개편 등의 정치적 해법에서부터 화합형 내각, 정책기조 전환 등 다양한 해석이 쏟아졌다. 국정개혁에 대한 기대가 컸던 탓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발걸음은 느렸고 방향도 불투명했다. 한나라당이 만든 쇄신안은 휴지조각이 됐고 천성관 검찰총장 카드는 여권의 도덕성과 정권 관리능력을 의심케 하는 자충수로 되돌아왔다.
이 즈음 이 대통령이 꺼내든 처방은 '친서민 중도실용'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국정기조였다. 하지만 대기업ㆍ부유층ㆍ수도권 중심의 MB노믹스에 식상한 국민들에겐 신선한 접근으로 다가왔다. 미소금융-보금자리주택-든든장학금으로 이어지는 친서민 정책 3총사는 허술한 설계와 제한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올해 초까지 정권의 지지율을 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정운찬 총리의 등장과 새해 예산안 파동으로 표현된 세종시 수정 작업과 4대강 사업엔 친서민도 중도실용도 끼어들 틈이 전혀 없었다. 정권의 돌연한 백년대계 주장과 총리의 좌충우돌 행보는 여당과 민심의 분열을 촉진하며 불안한 여권의 정치지형에 깊은 상처만 안겼다. 보금자리 주택 등 대통령이 늘상 자랑하는 친서민 정책이란 것도 준비 부족과 시장 오판, 어설픈 운용 등으로 당초 취지대로 굴러가는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되돌아보면 근원적 처방은 없었고 중도실용 역시 내용보다 슬로건에 그친 인상이 짙다. 이 대통령은 취임 2주년 전후 조사한 지지도에 거품이 끼어 있다는 것을 진작에 눈치챘던 것 같다. 권력형 비리와 도덕적 해이 등 집권 3년차 증후군을 경계하며 당정의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김우룡 전 방문진위원장의 망발을 기점으로 정권은 국정 전 부문에 걸쳐 진보와 보수의 편가르기 언동을 일삼았고 급기야 사법부 판결에 여당의원들이 떼거리로 반발하는 오만도 서슴지 않았다. 대통령의 촛불시위 반성 발언도 나왔다.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패거리 문화를 즐기던 여권에게 던져진 6ㆍ2 지방선거 결과는 1년 전 상황에 비해 훨씬 깊은 고민과 자성을 요구한다. 여당 내에서 청와대의 국정관리 기능 마비와 민심 이반을 꼬집으며 정풍 수준의 국정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끓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인권 민주 등 보수적 가치의 혁신을 등한히 한 채 온갖 우아를 떨다가 참패한 책임 소재를 정확히 가려야 해서다.
'민심 어뢰' 뭉개면 레임덕 자초
때만 되면 나오는 소리라고 해도 이 대통령은 뼈아프게 새겨들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대증요법과 임기응변을 넘어, 사람ㆍ조직ㆍ정책 등 권력문화 전반에 걸친 근원적 처방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그렇지 못하면 기껏 일궈놓은 거시경제 성과가 빛을 잃고 권력의 구심점도 흩어져 때이르게 레임덕을 맞을 수밖에 없다.
청와대는 인적 물적 자원의 한계를 앞세워 시간을 끌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천안함 어뢰'에 국민적 공분을 모아 신속ㆍ단호하게 대처했던 정권이 그보다 큰 '민심 어뢰'의 뜻을 뭉개며 처방을 늦추는 것은 왠지 어색하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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