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이 왔구나." "선생님, 저 성민인데요."
"아이고, 이제 헷갈리네." "그럴 만도 하죠, 벌써 10년인데요."
"하하하." "호호호."
6일 오후 서울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 앞에 한바탕 왁자지껄한 소란이 일었다. 모시로 된 생활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이순휘(57)씨와 2000년 2월 서울 노원구 당현초등학교를 졸업한 6학년3반 학생들이 주인공. 졸업 후 10년이란 세월이 지나니 담임선생님이던 이씨는 중년을 넘어 어느덧 환갑을 눈앞에 두었고 솜털 보송보송하던 제자들은 어엿한 청년과 숙녀가 돼 있었다. "10년 뒤 다시 만나 저마다의 꿈을 개봉하자"며 만든 '타임캡슐'을 열기로 한 이날, 이씨와 제자들은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웃음꽃을 피웠다.
34명 악동들과의 약속
부산에서 사업을 하던 남편의 병치레가 잦아져 26년 간의 교직생활을 마치기로 한 1999년 11월. 이씨는 '마지막 제자'들인 6학년3반 악동 34명과 약속을 했다. 각자 편지지에 1년간의 추억을 담은 글을 적고 함에 넣은 뒤 10년 뒤 만나 열어보기로 한 것. 6학년3반의 의미를 담아 '6월3일 오후 6시30분 63빌딩 앞'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 하기 위해 휴일인 이날 여의도역으로 시간과 장소를 바꿨다. 군대를 간 친구들과 유학 등으로 국내에 없는 친구들을 제외하고 15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타임캡슐을 싼 푸른 색 한지는 누렇게 빛이 바래 있었다. 이씨가 보관해 온 함을 열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편지지와 단짝끼리 찍은 스티커 사진, 가을 체육대회 때 반 이름으로 받은 상장 등 갖가지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각자의 편지지를 나눠주고 읽는 순서. "나는 우리 반의 비밀을 많이 안다. 영일이 팬티는 회색에 십자 무늬고 정우 것은 야광이다." 편지를 읽던 박재형군은 "내가 이걸 왜 썼지?"라며 머리를 긁적였고 친구들은 웃느라 배꼽을 잡았다.
그 시절 으레 있을 법한 사랑 고백도 이어졌다. 김형석군이 "주예리가 제일 좋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져 나왔고 함께 있던 주예리양의 얼굴은 발그레해졌다. 학급 회장이었던 서백규군은 "우리 반 여자 애들 중에 괜찮다고 생각하는 애가 있다. 나의 어릴 적 예쁜 천사와 닮았다. 세영아, 난 너한테 관심 있는데 넌 어때? 우리 10년 뒤 다시 만나면 어떨까?"라고 썼다. 서군은 "이 글을 썼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세영이는 세종대를 다니다 자퇴하고 호주에서 호텔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한 달에 두어 번씩 전화로 안부를 주고 받을 정도로 가깝게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10년 뒤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이씨는 제자들에게 들려주려 '땅 속에 묻은 약속'이란 제목의 시 한 수를 지어왔다.
"그날이 생각난다/ 그날이 다가온다/ 다시 보면/ 서른 넷의 악동들은/ 어떤 꽃을 피웠을까 … (중략) … 정화수 떠놓고 비는/ 어미 마음 되었다" 마냥 신나 떠들던 악동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제자들에게 책 한 권도 선물했다. 2010년 여름호. '눈 오는 밤에'등 올해 시조시인으로 공식 데뷔한 이씨의 작품 네 편이 들어 있다. 이씨는 "원래 이달 1일 나오기로 돼 있었는데 조금 늦어져 걱정했다"며 "다행히 아이들과 모이기 전에 나와 선물로 줄 게 생겨 기쁘다"고 말했다.
올 7월에는 예절 강의를 나가고 있는 부산 기장문화예절학교에 1박2일 일정으로 악동들을 초대할 계획이다. 이씨는 "너무 성적 위주로 교육을 하다 보니 인성교육을 할 시간이 부족한 것 같다"며 "잊을 만하면 터지는 교권침해 사례도 인성교육에 투자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씨와 15명의 악동들은 또 하나의 타임캡슐을 만들었다. 이것 역시 10년 뒤 열어보기로 했다. 이씨는 "10년 뒤 누가 봐도 자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다짐하는 글을 넣었다"며 "서로 우정을 나눌 수 있고 자신이 적은 글의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느냐"고 기대했다. 형석군은 "10년 만에 본 애들도 꽤 많은데 이번 기회에 계속 연락하고 자주 봤으면 좋겠다. 이런 기회를 주신 선생님께 감사 드린다"고 말했다.
"2020년 다시 모일 그날에는 결혼한 아이들도 있을 테고 지금보다 훨씬 많아지겠죠? 다시 만날 때까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모두 건강하면 좋겠어요." 마지막 제자들에게 바라는 선생님의 소망이었다.
이성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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