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80세'. 지난 5월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한국인의 평균수명이다. 193개 회원국 중에서 17위. 1위 일본의 83세에 비교해봐도 크게 뒤지지 않는 수치이다. 이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사는' 국가 대열에 합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균 57세'. 지난 3월 노동부가 발표한 직장인의 평균 은퇴 연령이다. 상시 근로자 300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사업장 2,469 곳의 평균 정년을 조사한 결과다. 그러나 현재 직장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57세까지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질문한다면 그 전에 그만둘 것 같다는 대답이 훨씬 많을 것이다.
통계와 현실의 차이를 일단 제쳐 두고라도 평균 80세에서 57세를 빼면 23년이 남는다. 근로소득 없이 살아야 하는 은퇴 기간이다. 현 추세대로 수명은 더욱 늘고 정년은 빨라진다면 소득 없이 살아야 할 기간은 더 길어질 수도 있다.
은퇴준비, 서두를수록 좋다
평안한 노후를 위해서 직장에 있을 때 미리 노후 자금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 인지하는 사실이지만, 막상 실천에 옮기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실제로 55세 이상 은퇴자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5% 이상이 은퇴 전까지 노후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당장 필요한 지출에 비하면 노후 준비는 아무래도 우선순위가 밀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후 준비는 가능하면 빨리 시작해야 한다. 57세에 은퇴해서 80세까지 23년을 은퇴기간으로 가정한다면, 27세부터 30년간 은퇴를 준비하는 것과, 47세부터 10년간 준비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계산을 통해 확인해보자. 은퇴 후에 매 달 180만원의 생활비가 필요하다고 가정했을 때, 연평균 수익률이 5%라고 하면 27세부터 준비하는 사람은 매달 121만원을 저축해야 하지만 47세부터 준비할 경우 매달 387만원씩 모아야 겨우 목표 금액을 맞출 수 있다.( 참조)
안정적인 소득원을 만들어라
설사 일찍부터 꾸준히 준비해서 은퇴 시점에 충분한 목돈을 마련했다고 해도 이 자금을 은퇴 기간 동안 유지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목돈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이 들어오기 마련이다.
타인의 부탁이라면 어떻게 거절해 볼 수 있겠지만, 친지나 자녀가 손을 내밀면 고개를 내젓기가 쉽지 않다. 사업에 실패한 자녀가 도움을 요청할 때 내 노후를 위한다며 가진 돈을 움켜쥐고 거절할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되겠는가. 실제 주택대출을 다루는 금융기관의 내부 분석에 따르면 대출금을 갚지 못해 경매에 몰리는 주택의 20% 정도는 자녀가 부모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경우라고 한다.
안락한 노후 생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꾸준하고 안전한 소득원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가급적 매달 필요한 만큼만 받아서 사용하고 남은 돈은 쉽게 인출할 수 없는 장치를 만들어 두는 것이 좋다. 이런 용도에 딱 맞는 게 바로 연금이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연금 3총사만 잘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다면 조금 과장해서 노후 자금 준비의 90%는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노후대비의 기본, 국민연금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을 가리켜 '3층 (노후)보장 체계'(풀어읽는 키워드 참조) 혹은 '3층 연금 체계'라고 한다. 3층 연금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1층(국민연금)과 2층(퇴직연금)의 역할 및 대상을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국민연금은 3층 노후보장 시스템의 기본을 이루는 것으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 원래 1층의 목적은 국민의 생활 안정을 위해 최저 생계비를 보장해주는 것이다. 국가가 제공하는 보장 서비스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세금을 걷어 고령자들에게 분배해 주는 것이 본래의 취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은 보험의 원리를 도입해서 소득에 따라 보험료와 연금액이 달라지는 소득비례 부분을 섞어놓았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국민연금을 낼 때 마치 내지 않아도 될 돈을 억지로 내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지금 쌓인 돈이 고갈되면 더 이상 연금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오해하곤 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국민연금은 세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득 수준이 낮은 사람도 낸 보험료에 비해 많은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현재는 고소득자도 납부한 보험료의 두 배 가까운 돈을 평생 동안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ㆍ 참조). 만약 쌓아놓은 연금기금이 고갈된다면 그 때부터는 매년 필요한 연금액을 세금으로 걷어 지급하는 부과방식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
2,3층으로 부족분을 채워라
최근 언론에 '국민연금 받고 보니 얼마 안되네' 라는 기사가 실렸다. 국민연금을 받아보니 퇴직 전 월급의 4분의1도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는 국민연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얘기다. 국민연금의 역할은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 풍요로운 생활 수준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은 연금을 지급하다간 결국 국가 재정에 문제가 오고 그 부담은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지워질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실제로 칠레 같은 나라는 이미 공적연금의 재정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국민연금을 민간에 위탁하는 연금 개혁을 실시한 바 있다.
고령화가 진전되면서 칠레뿐 아니라 많은 국가에서 공적연금의 역할을 축소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고령화 속도 세계 1위인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국민연금의 비중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만큼 2층 퇴직연금 제도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국가가 전부 짊어질 수 없는 노후 보장 서비스를 기업, 즉 민간 부문과 나누어 감당하는 것이 2층 퇴직연금제도의 설립 취지이기 때문이다.
퇴직연금 제도는 기업이 근로자의 노후소득보장을 위해 직장에 근무하는 기간 동안 퇴직급여를 외부 금융기관에 적립하여 운용하고 근로자가 퇴직할 때 연금 또는 일시금으로 지급하는 제도이다. 크게 근로자의 근무기간과 급여에 따라 연금액을 보장해주는 확정급여형(DB) 퇴직연금 제도와 근로자 본인이 직접 운용지시를 내리고 그 결과에 따라 연금액이 달라지는 확정기여형(DC) 제도로 나뉜다. 설령 다니던 회사가 망하더라도 그 동안 근무한 부분에 대한 퇴직연금은 별도 금융기관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앞서 강조한 '안전한 노후 자금'의 자격이 있다고 하겠다.
노후 준비는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직장인이라면 이미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에 가입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아직 회사가 퇴직연금을 도입하지 않았다면 근로자 자신의 노후보장을 위해 하루 빨리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도록 회사에 건의해야 한다. 1층과 2층 연금은 내가 따로 돈을 내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나의 노후준비이기 때문이다.
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의 노후 자금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니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국민연금공단 홈페이지나 퇴직연금 사업자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내가 미래에 받을 연금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먼저 이 금액을 확인하고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지금부터 3층 개인연금 등을 통해 추가로 준비하면 되는 것이다.
의 저자 스티븐 코비 박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후 준비는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이다. '중요하지 않지만 급한 일들'에서 잠시 벗어나 저자의 충고대로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에 미리부터 집중할 수 있다면 성공적인 노후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풀어읽는 키워드
● 3층 보장 체계(three pillar system)
1994년 세계은행의 '고령화 위기 대처 보고서(The Averting Old-age Crisis)'에서 처음 사용됐다. 당시 세계은행은 급격한 고령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가가 기초생활을 보장해주는 1층 공적연금(국민연금)과 근로자 중심의 2층 사적연금(퇴직연금) 두 제도에 의무적으로 가입하고, 추가로 필요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3층 개인연금에 가입하는 공ㆍ사연금 다층체계화(multi-pillar system) 노후 보장 시스템을 갖출 것을 권고했다.
■ 노후 준비자금 月189만원 vs 58만원
입사 13년 차인 김 과장은 올해로 40세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평균 정년까진 앞으로 20년, 김 과장이 지금부터 노후 자금을 모은다면 한 달에 얼마나 저축해야 할까?
2009년 설문 조사 결과 부부가 살아가기에 필요한 적정노후 생활비는 174만원이라는 통계가 나왔다. 만약 평균 연령 80세까지 생존한다고 가정하면, 김 과장은 지금부터 매달 189만원을 저축해야 은퇴 후에 매달 180만원을 받으며 살 수 있다. 김 과장의 현재 월급이 250만원이니 월급의 3분의2 이상을 노후 자금으로 저축해야만 은퇴 후에 필요한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다는 얘기다.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김 과장이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의 도움을 받는다면 필요 저축액은 훨씬 줄어든다. 27세부터 직장에 다녔으니 60세 정년까지 국민연금을 납부한다고 가정하면 김 과장의 소득을 기준으로 계산한 국민연금 수령액은 월 69만원이다. 여기에 60세까지 근무했을 경우 받을 수 있는 퇴직연금 적립액이 약 1억7,000만원(수익률 5% 가정)이다. 60세부터 퇴직연금을 받고, 65세부터는 국민연금을 받아 필요한 생활비를 충당한다면 평균적으로 매달 약 118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확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62만원 정도를 지금부터 준비하면 노후 자금 마련의 숨통이 트일 수 있다. 연평균 수익률이 5%라고 가정하고 계산해보니 지금부터 매월 58만원 정도만 저축하면 된다.
189만원과 58만원. 3층 보장 체계를 잘 활용하면 노후 부담을 이만큼이나 줄일 수 있다. 앞으로 내가 받을 연금이 얼마인지 궁금하다면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내연금(http://csa.nps.or.kr)'을 방문해보자. 현재 나이와 소득 수준 등 간단한 정보를 입력하면 앞으로 내가 받을 연금이 얼마이고 추가로 얼마를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전용우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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