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배수아(45)씨가 일곱 번째 소설집 (창비 발행)을 펴냈다. 창작집으로는 (2006) 이후 4년 만에 낸 것으로, 8편의 중단편이 수록됐다. 이야기보다는 사유가 도드라지는, 때론 한 문장이 책 한 쪽을 넘어설 만큼 길고 유려한 문장이 '배수아 소설은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봐도 알 수 있다'는 정평을 새삼 확인시킨다.
수록작 '양의 첫눈'은 등장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통해 우회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배씨의 문학적 개성을 잘 보여주는 단편이다. 고립된 삶을 살고 있던 남자 '양'이 8년 전 헤어진 여자 친구 '미라'에게서 만나자는 일방적 연락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드센 성격을 지닌 옛 연인과의 재회를 앞두고 초조해하는 양의 심정을 그의 회상을 통해 표현한다. 미라의 편지를 받은 양은 우연히 파티에서 만났던 키 큰 연인, 도서관에서 만난 성실하고 잘 생긴 남자 직원을 떠올리며 이들을 이상적인 커플이자 (동성애) 연인으로 선망한다. 하지만 현실의 그는 기어이 자신을 찾아온 미라를 보며 예전에 썼던 문장을 무기력하게 떠올릴 뿐이다. "이십년 동안 나는 어떤 장소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 그 누구도 나와 가까운 곳에 살지 않는 그런 장소를."(35쪽)
이상과 현실이 괴리되는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은 단편 '북역'의 주제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몇 달 전 한 기차역에서 헤어진 여자를 떠올린다. 그녀와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는 그의 회상엔 실제 일어난 일과 내심 바랐던 일-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기차에 올라타고 싶은 욕구-이 뒤섞여 있다. 사랑을 스스로 외면해버린 그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찬찬히 뒤지면서 소설은 그의 의식 심층에 자리한 정신적 내상을 드러낸다.
어찌보면 몇 문장으로 정리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배씨는 인간 내면의 심층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근사하고 독창적인 소설로 만들어낸다. 그의 문장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끝모르게 이어지는 인간의 의식을 닮아 있다. "소설이 스토리텔링에 얽매여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산문에 대한 통상적인 장르 구분이 되레 자유로운 글쓰기를 제약하는 건 아닐까요. 간결하고 정제된 문장만이 소설적 글쓰기라는 통념도 그렇고요."
'올빼미'와 '올빼미의 없음'은 서사를 넘어 소설을 사유 확장의 도구로 삼고자 하는 배씨의 의지가 느껴지는 연작 단편이다. 두 작품 모두 작가인 주인공과 비평가인 그의 친구가 나누는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올빼미'에선 꿈을, '올빼미의 없음'에선 죽음의 본질을 폭넓게 논한다. 소설의 기승전결을 따지기보다는 한 문장씩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에세이를 닮은 작품들이다.
예컨대 '올빼미'에서 한 인물은 꿈에 대해 이렇게 일갈한다. "분명 개인으로서는 평범한 인간일 그들이 모호함과 신비함으로 그토록 무장하고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로 인해 증폭되고 완성되는 가상의 위대성을 네가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57쪽)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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