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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47> 교도관의 신뢰 얻기 위한 의도적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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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47> 교도관의 신뢰 얻기 위한 의도적 노력

입력
2010.06.06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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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적에서는 교도관과 관계된 일이 많다. 4차례나 구속되어 10년 가까이 징역을 산 데다 나 때문에 교도관을 특별 배치함으로써 교도관과 나 단 둘이서 생활한 때도 많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교도관과 재소자는 기본적으로 관계가 좋지 않다. 한쪽은 감시하는 위치에 있고 다른 한쪽은 감시 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일 거다. 더욱이 시국사범의 경우 재소자 처우개선이나 민주화 투쟁 문제로 교도관과 다투는 일이 많아 관계가 좋기 어려웠다. 나의 경우는 더 말할 게 없었다. 가는 곳마다 교도소 당국이 특별 관리할 정도로 많은 문제를 야기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와 교도관과의 관계는 대단히 좋았다. 교도관의 도움으로 몰래 글을 써서 밖으로 내보내 책을 출간한 일이 있는가 하면, 피신할 때 전직 교도관의 집에서 지낸 일도 있었다. 소장이나 과장 등 간부들은 나를 귀찮아 했지만 사방(舍房)에서 근무하는 일선 교도관들은 나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교도관과 관계가 좋았던 건 그들이 나의 인간성이나 민주화론에 상당히 공감했기 때문이었겠지만 나의 의도적인 노력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교도소 당국을 상대로 투쟁한 일이 많고 또 비밀 문건을 작성해서 밖으로 내보낸 일도 많은데,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선 일선 교도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관계가 좋아야 했다. 사회와 완전히 격리된 고립무원의 교도소에서 때로는 생명까지 걸고 투쟁해야 하는 터에 교도소 당국의 방침을 알려주거나 교도소 바깥으로 연락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교도관뿐인데, 그들 가운데 내 주장에 공감해서 나를 돕는 사람이 없고서는 투쟁에서 이기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교도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선 먼저 그들이 나를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관규를 위반하거나 특권을 누리는 일은 일체 하지 않음으로써 교도관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나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 운동, 목욕, 접견은 물론 부식, 의복, 담배 등에서 특권을 누리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으나 나는 그런 일을 일체 하지 않았다. 심지어 교도소 당국에서 특권을 부여해도 극구 사양했다. 특권을 누리는 게 옳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교도관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다. 재소자 처우개선이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할 때 이외에는 관규를 위반하는 일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게 함으로써 교도관들이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교도관들이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일반적으로 교도관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강한 열등감을 갖고 있는데, 그럴 일이 아님을 역설했다. 교도관직은 우리 사회의 안녕을 파괴하거나 위협하는 범죄자들을 교정ㆍ교화해서 사회로 복귀시키는 일을 하는 아주 소중한 직업임을 일깨워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교도관은 배운 것도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재소자들을 직접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이것은 행운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과 기쁨을 누릴 때 가장 행복한데 교도관직은 그럴 수 있는 좋은 직업임을 역설했다.

문제는 열악한 근무조건이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나 자신이 교도관의 처우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978년 대구교도소에서 함께 징역을 산 재일동포 유학생 사건의 서승은 그의 저서 에서 나더러 '감옥의 제갈공명'이라 평하면서 "장기표씨는 교도관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는 한 재소자의 처우도 개선될 수 없다고 보아 재소자의 처우개선을 요구할 때는 반드시 교도관의 처우개선도 함께 제기했다"고 썼다. 그의 과분한 칭찬과 정확한 기억은 그의 남다른 동지애 때문이겠지만 내가 그렇게 한 것은 사실이었다. 서승은 1995년 어느 날 일부러 내게 찾아와 밤을 새워가며 "정치를 하지 말고 재야활동을 계속하라"고 강권한 일이 있다. 그의 우정에 찬 강권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동지에 대한 그의 남다른 사랑이 새삼 그리워진다.

그러나 교도관들에게 잘 보이는 것만으로 나의 목적을 관철할 순 없었다. 때로는 나를 겁내도록 만들 필요도 있었다. 비밀문건을 작성해서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선 볼펜을 몰래 소지하고 있어야 하는 데다 비밀문건을 몸에 지니거나 감방 안에 숨겨둘 수 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검신(檢身)과 검방(檢房)을 함부로 할 수 없게 해야 했다. 그래서 검신과 검방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만 생겨도 그것을 트집 잡아 엄중하게 항의함으로써 나에 대해 검신과 검방을 하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내가 쓴 자술서나 항소이유서, 비밀문건 등은 모두 이런 집요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안양교도소에 있으면서 진행된 항소심 재판은 인정신문만 하고 항소이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런데 항소이유서에서 쓰지 못한 내용이 많아 부득이 상고를 하게 됐는데, 상고를 했더니 곧바로 홍성교도소로 보냈다. 대개의 경우 큰 교도소로 보내지만 나의 경우 큰 교도소로 보내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봐선지 작은 교도소로 보냈다.

홍성교도소는 재소자가 400명 정도 되는 작은 교도소로 공기도 좋고 운동장도 넓으며 교도관들도 순박해서 생활하기가 아주 좋았다. 특히 염창근 소장이 재소자들을 잘 보살펴 가벼운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시국사범이 많지 않은 데다 교도소 당국과의 관계도 원만해서 시국사범들이 한 방에 모여 식사를 함께 하며 토론도 할 수 있어 아주 좋았다.

내가 홍성교도소에 갔을 때는 민추위 사건의 문용식, 미문화원 사건의 장영성, 삼민투 사건의 정태근 등이 있었고, 그 뒤 구학련 사건의 김영환, 서울대시위 사건의 원동욱, 제헌의회 사건의 김현수 등이 이감을 와 함께 지냈다. 다들 일가견이 있어 공부에 큰 도움이 됐다.

홍성교도소에 있은 1987년 4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는 87년 6월 민주항쟁을 전후한 때라 교도소에 있으면서도 무척 바빴는데 다음 회에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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