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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보리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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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보리누름

입력
2010.06.06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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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현리의 보리밭이 누렇게 잘 익었습니다. 참 잘 익었다는 말이 감탄사처럼 절로 나옵니다. 벼가 익어 만드는 황금빛과 보리가 익어 만드는 황금빛에는 색도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바라보는 것으로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빛깔인 것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이 욕심 없이 배부른 빛깔이라 생각합니다. 잘 익은 것에 대해 우리는 흔한 비유로 황금빛이라 하지만 광산에서 캐내는 금덩어리의 빛깔과는 '자연의 아우라'가 다릅니다. 금덩어리는 원자번호 79인 단단한 귀금속이지만 잘 익은 보리는 살아있는 예술입니다.

저 보리가 추운 겨울을 나고 풋풋한 청 보리의 시간을 보내고 마침표를 찍는 시간에 도착할 때까지를 지켜보면서 보리의 '수난시대'를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보리농사는 입동 무렵 씨를 뿌려놓으면 그만입니다. 보리밟기를 하지 않고 풀매기를 하지 않습니다. 보리가 익기를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청보리 무렵 보리 이삭을 포함한 전부를 싹둑 베어 가축의 사료로 사용합니다.

보리가 익을 때까지 꼿꼿하게 서있기가 시골에서조차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잘 익은 보리밭 구경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보리가 잘 익은 철을 '보리누름'이라 말합니다. 보리가 익지 않고 사라진다면 보리누름, 이 아름다운 말도 사라질 것입니다. 보리누름입니다. 그 위로 하늘은 맑고 뭉게구름 피어납니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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