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리 위에 주인 잃은 고급 승용차가 보인다. 차의 소유주로 추측되는 한 남자의 시체가 해변가에서 파도에 흔들리는 장면이 뒤를 잇는다. 프랑스 영화 '유령작가'는 그렇게 한 죽음에 대한 거대한 의문부호로 출발한다. 누가 왜 죽였을까?
'유령작가'는 문제적 영화다. 전 영국 총리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회고록을 집필하는 대필작가 '유령'(이완 맥그리거)이 의문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헤어나오는 과정을 통해, 현재의 국제질서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론을 제기한다.
영국 총리가 청년시절부터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는 내용은 아무리 허구라지만 도발적이다. 더군다나 랭은 노동당 출신으로 10년을 장기 집권하며 미국의 이라크전을 맹목적으로 도왔다. '부시의 푸들'이라 놀림 받았던 토니 블레어 전 총리에 대한 노골적인 야유라 할 수 있다.
의문부호로 시작한 영화는 연쇄적으로 의문부호를 던진다. 사고로 죽은(것으로 위장된) 전 대필작가를 대신해 글을 쓰게 된 '유령'은 회고록을 쓰면서 랭의 진짜 과거를 양파껍질 벗겨내듯 알아간다. 동시에 그의 신변을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느끼게 된다. 몇 번이고 예상을 빗나가게 하며 영화는 관객의 심장을 죈다. '피아니스트'로 2002년 칸 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받고, 이듬해 아카데미 감독상까지 받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연출 솜씨가 돋보인다.
이 영화는 폴란스키의 개인적 삶과 떼놓고 볼 수 없다. '악마의 씨'(1968), '차이나타운'(1974) 등으로 할리우드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폴란드 출신의 이 문제적 감독은 스크린 밖에서의 영화 같은 사건들로 사람들의 입에 여러 차례 올랐다. 만삭이었던 영화배우 아내 샤론 테이트가 1969년 희대의 살인마 찰리 맨슨의 추종자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 비극은 서막에 불과했다. 폴란스키는 1977년 13세의 배우 가이머에게 술과 수면제를 먹인 뒤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재판을 받다가 이듬해 프랑스로 도주한 뒤 30년 넘게 도망자 신세로 살아야 했다. 미국 수사당국의 집요한 소환 요구에 시달리던 그는 지난해 9월 취리히영화제 참석을 위해 스위스를 찾았다가 체포돼 억류 생활을 하고 있다.
전범 신세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영화 속 랭에게 참모들은 조언한다. "이 나라(미국)에 있는 한 안전합니다… 이라크, 중국, 북한, 인도네시아, 이스라엘 등과 함께 국제형사재판소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이니까요." 세계의 경찰국가임을 자부하면서도 자기 편의대로 행동하려는 미국에 대한 직설적인 비난이나 다름없다. 미국에 머물고 있는 랭의 숙소에서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악몽과도 같은 현실과 맞닥뜨려야만 하는 '유령'의 신세는 폴란스키의 잊고만 싶은 끔찍한 미국 생활과 절묘하게 포개진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이라고 할까, 미국에 비수를 내미는 듯한 이 영화를 만들고 폴란스키는 체포됐다. '괘씸죄'가 적용됐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이고 또 다른 음모론일까. '유령작가'는 텍스트로서의 재미뿐 아니라 영화 외적으로도 흥미로운 상상을 자극한다. 원작은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로버트 해리스의 동명 소설. 올해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인 감독상을 받았다. 2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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