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학회는 1952년 11월 30일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몇몇 경제학자들이 모여 창립했다. 초대회장에는 신태환 교수(작고)가 추대되었고, 1956년부터 78년까지의 22년 동안은 최호진 교수가 회장직을 맡았다. 1914년에 태어나신 최호진 교수는 해방 후 한국의 경제학계를 이끌어 온 경제학계의 원로로서 지금도 건강을 유지하고 계시다. 한국경제학회는 일본과 국내에서 교육받은 경제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폐쇄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하여 미국에서 공부한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1977년에 한국 국제경제학회를 창립하였다. 회장 임기는 1년으로 하고 초대회장에 서울대 조순 교수를 선출하는 한편 개방적인 학회 운영을 표방하였다. 이에 자극 받아 한국경제학회도 그 후 운영방식을 개방하고 개혁하여 오늘날에는 두 학회가 모두 동질화 되었다. 지금 한국경제학회는 회원 2,000명 국제경제학회는 회원 1,500명의 큰 학회로 성장하였다.
나는 1986년에 제9대 국제경제학회장을 맡아 1년 동안 봉사하였다. 여름과 겨울 두 차례의 학술대회를 열고 국ㆍ영문 학술지를 각각 발행하였다. 특히 여름 학술대회는 전주에서 성대히 열었는데 여기에는 전북대 조선웅 교수의 공헌이 매우 컸다.
1999년에는 한국경제학회장에 피선되어 여러 차례의 학술대회와 국ㆍ영문 학술지발간 등 사업을 주관했다. 그런데 가장 어려웠던 것은 적어도 1억 원 이상의 학회 운영자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결국 경제단체나 대기업에 협조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적지 않은 민폐였다. 더구나 예전에는 경제학회가 한 두 개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내가 한국경제학회장을 할 당시만 해도 한국의 학회가 모두 1,000개를 넘고 경제관련 학회만 해도 60여개나 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는 모든 경제학회 활동이 미국경제학회(AEA)산하에 모여서 하고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 나는 각 학회장들의 모임을 마련하고 우선 학술대회만이라도 한국경제학회 중심으로 통합하여 열기로 하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지금 학술대회가 그러한 방향으로 개최되고 있는 것은 진일보라 하겠으나 앞으로는 모든 경제관련 학회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 일생에 나 스스로 크게 잘못 판단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중앙대 총장선거에 입후보 했던 일이다. 1996년 12월에 총장선거가 있었는데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나도 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했다. 내가 잘못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나 스스로 자신에 대한 평가를 잘 못했다는 뜻이다.
나는 대학 전반에 대한 개혁과 외부자금 수혈을 내걸고 총장선거에 나섰다. 나의 다양한 사회적 활동경험을 바탕으로 대학경영을 잘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것을 교수들과 교직원들이 알아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대학 선거는 정치판 선거에 못지않게 학연과 지연의 연고주의가 판을 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사립대학에서는 모교출신이 아닌 사람이 겪어야 하는 불이익은 매우 크다. 그러나 이보다도 내가 대학 밖에서의 공직과 사회활동이 많아서 대학운영에 도움이 되고 그래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것이 바로 나의 판단 착오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나는 대중성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선거판에 뛰어들면 안 된다는 평범한 사리를 잊은 것이다. 내가 밖에서 공직과 사회활동을 많이 한 것은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었으며 그래서 선거에서의 낙선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것은 내게 좋은 교훈이었다.
그러다가 2001년 2월28일 나는 만 65세로 교수의 정년을 맞이하였다. 요즘 50대에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하는 타 직종을 생각한다면 65세 정년은 매우 부러운 경우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나는 평생 동안 직장 걱정을 해본 일이 없었으니 이 점에서도 행운이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정년이란 이제 후선으로 물러나 인생을 정리하기 시작하라는 뜻이 있음을 생각하면 뭔지 허전한 감회도 없지 않았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좋은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대학교수로서의 25년간을 회고하면 만감이 교차하기도 했다. 학자로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 동안 열정을 담아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폭넓은 사회활동도 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저서도 펴낼 수 있었다. 1969년에 펴낸 에 이어 1976년에는 1982년에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쿠즈네츠 교수의 저작을 요약한 , 1983년에는 , 1987년에는 사이먼 쿠즈네츠의 저서를 번역한 (공역), 1996년에는 을 펴냈고 그 뒤 2006년에 를 한국은행에서 출판했다.
후배 교수들과 제자들이 정년기념논문집의 발간을 추진하려 했으나 나는 이를 사양하고 다만 정년기념 강연과 고별 다과 모임만을 갖도록 했다. 강당에 모인 교수들과 제자들 앞에서 나는 우리의 대물림 가난을 물리치는데 참여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강단에서 열정을 가지고 제자들을 가르친 데 보람과 성취감을 가지고 교단에서 물러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내 삶의 방식은 바뀔 수 있지만 가치창조와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는 내 삶의 본질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책장과 비품 등은 후배 교수에게 물려주고 책과 짐을 트럭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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