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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37> 율곡 이이의 외할머니 용인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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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37> 율곡 이이의 외할머니 용인이씨

입력
2010.05.3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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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李珥)는 퇴계 이황(李滉)과 함께 조선적 주자학을 확립하는 데 쌍벽을 이룬 유학자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학문과 서화에 뛰어난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그리고 율곡의 생애에 크게 영향을 미친 다른 한 여인이 있었으니 외할머니 용인이씨이다.

율곡은 1536년(중종 31)에 강릉 외가인 오죽헌(烏竹軒) 몽룡실(夢龍室)에서 태어났다. 오죽헌은 원래 성종 때 형조참판을 지낸 강릉사람 최응현(崔應賢)이 지은 것으로 뒤에 그의 사위 이사온(李思溫)에게 주었다. 이사온에게는 딸 하나만 있었는데 그 딸이 바로 율곡의 외할머니 용인이씨이다. 그녀는 서울에 사는 신명화(申命和)에게 시집갔는데 부모 봉양 때문에 친정을 지키고 있었다.

용인이씨는 딸 다섯을 두었는데 둘째 딸이 율곡의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이다. 신씨는 율곡의 아버지인 덕수이씨인 이원수(李元秀)에게 시집갔으나, 37세에 시가(媤家)의 살림을 맡을 때까지는 친정인 강릉에서 살았다. 16세기까지만 해도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 유행해 사위가 여자 집에 살다가 자식이 장성한 뒤에 본가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강릉에는 율곡을 유달리 사랑하던 외할머니가 있었다. 더구나 16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자 율곡이 의지할 곳은 외할머니 밖에 없었다. 어머니를 여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교에 귀의할 정도로 방황하던 율곡이 1년 만에 돌아와 처음 찾아간 것도 외할머니였다. 그에게 외할머니는 벼슬하기 전이나 후나 어머니를 대신해 따듯하게 대해주는 마음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용인이씨는 남편이 병이 나서 위독해지자 칼로 자신의 팔을 찔러 피를 내어 쾌유를 빌 정도로 칼칼한 여자였다. 이러한 외할머니의 성품이 딸인 사임당이나 율곡에게 전수되었다. 율곡의 언론이 준절한 것도 필시 그 영향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뒤에 벼슬에 나아가서도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할 때면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 강릉을 찾았다. 율곡은 선조에게 "조정으로 본다면 신은 있으나마나 한 보잘것없는 존재이오나 외조모에게 신은 마치 천금의 보물 같은 몸이오며, 신 역시 한번 외할머니가 생각나면 눈 앞이 아득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고 술회하고 있다. 오죽헌의 외할머니는 율곡의 마음의 고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율곡은 6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 본가로 올라왔다. 친할머니 남양홍씨(홍귀손 녀)가 연로해 어머니 사임당 신씨가 살림을 도맡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율곡의 집안은 파주에 살았는데, 생활이 넉넉지 않았다. 율곡의 할아버지는 벼슬을 못했고, 아버지도 음사(蔭仕)로 겨우 수운판관·감찰 등의 낮은 관직을 역임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율곡의 집안이 한미했던 것은 아니다. 증조부 6형제 중 의무(宜茂)의 아들 행(荇)과 기(芑)는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냈으며, 이기는 윤원형과 더불어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율곡의 가문은 훈척적 경향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훈척계가 사림계로 전향하는 전향사림파가 많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율곡의 윗대는 훈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율곡 당대에는 사림의 대표로 전향한 것이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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