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경기 하남시 미사리 경정경기장. 시합을 앞둔 선수들이 한창 시험 주행을 진행하고 있다. 관제실 심판원의 출발 신호와 함께 보트들이 출발선을 지나가자마자 선수들이 모니터를 재빨리 바라본다. 모니터의 굵은 선, 가는 선들 위에 색색의 보트들이 또렷이 그려져 있다. 함은철 국민체육진흥공단 경정본부 심판팀장은 “1초에 500장의 사진을 찍어 이어 붙인 것처럼 시간을 평면으로 펼친 원리”라며 “출발 신호 후 1.5초 안에 출발선을 통과하지 않은 선수는 실격처리 하기 때문에 1,000분의 1초까지 정확히 재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밀함이 생명인 이 시스템은 국내 벤처 기업 ‘비솔’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1992년 공단이 이름난 해외 제품을 쓰지 않고 국내 소규모 회사 제품으로 결정했을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물음표를 달았다. 함 팀장은 “보트 1대가 실격 처리되면 고객에게 15억원 가량을 환불해야 하고 매출에도 큰 지장을 줄 수 있기에 충분한 기술력을 지니지 않으면 채택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경정장만이 아니다. 전국의 경마장(3곳), 경륜장(3곳)에서 쓰는 순위 판독 시스템은 물론 시간 계측 장비, 신호기기, 전광판을 포함한 통합운영 시스템은 모두 비솔 제품이다.
비솔은 ‘순간을 사로 잡는’과학이 밑바탕이 되는 영상계측이라는 한 우물만 10년 넘게 파왔다. 이정수(49) 대표는 2000년 직장 동료 3명과 함께 5,000만원을 종잣돈으로 회사를 차렸다. 비솔(Vision Solution)이라는 이름은 ‘눈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
특이하게도 기계공학을 전공한 이 대표를 빼고는 핵심 기술 인력들은 모두 물리학 전공자다. 그것도 모두 국내 석ㆍ박사 출신이다. 육상현(41) 영상계측연구소장은 “물리학은 특성상 다른 분야에 비해 가능, 불가능에 대한 판단이 빠르고 정확하게 하다”며 “사업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물리학이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길(영상계측)로 성공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분명했다”고 말했다.
비솔의 또 다른 무기인 고속조명시스템 역시 이 회사가 2000년 국산화에 처음 성공했다. 고속조명시스템이란 충돌 시험과 같은 초고속촬영을 위해 깜박거림이 없고 5,600∼6,000K(캘빈ㆍ 색 온도)의 유사 태양광을 만드는 조명기기를 말하는데 중국 시장을 중심으로 해외 러브콜이 끊이지 않고 있다.
비솔은 지난해 8,000W급 고속조명시스템으로 중국자동차공업연구소와 광둥성이 함께 설립한 광둥성 자동차테스트센터(GATC)와 40만 달러 규모의 조명시스템 수출 계약을 따낸 것을 시작으로 세계 최대 유아용품 생산기업 굿베이비(Good Baby)와 8만 달러 규모의 계약도 따냈다. 올 들어서는 포드로부터 볼보를 인수해 화제를 모은 중국 최대 민영자동차 회사 지리(吉利)자동차와도 40만 달러, GATC에 추가로 40만 달러 어치를 수출하기로 했다.
특히 고속조명시스템의 최대 수요처로 꼽히는 중국 시장에서 독일, 영국, 미국의 전문업체와 경쟁을 통해 얻은 성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육 소장은 “현재 고속조명 시장은 1,000억 원에 달하는 데 이 중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올해 40%가량 될 것”이라며 “가격 경쟁력이 높고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이점까지 있어 중국 시장에서 상당히 유리하다”고 내다봤다. 독일의 고속조명시스템업체로부터 함께 손잡고 인도, 러시아 시장에 진출해 보자는 제안을 받고 현재 공동 작업을 진행 중이다.
‘KNOW 3D’라는 이름의 3차원 동작분석 계측 시스템도 비솔의 자랑거리. 미국 할리우드 영화나 첨단 스포츠 과학, 재활의학 등에 폭넓게 쓰이고 있는데 2004년 이화여대 목동병원의 재활의학 파트에서 비솔의 시스템을 도입했고 현재는 국내 대학 스포츠 계열학과 10곳 중 6곳은 운동 역학 측정장비로 비솔 시스템을 쓰고 있다.
지난해 매출 27억원을 올린 이 대표는 “매년 매출의 15%를 연구개발비에 쏟고 있다”며 “지금까지 이룬 것도 처음엔 모두 꿈이라고 했지만 해냈듯이 국산화 기술로 세계 무대를 평정하겠다는 진짜 꿈을 꼭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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