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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봄날에 떠난 겨울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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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봄날에 떠난 겨울나그네

입력
2010.05.31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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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앞 샘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나는 그 그늘아래 단 꿈을 꾸었네” 로 시작되는 ‘보리수(Lindenbaum)’는 슈베르트의 연가곡 중 일부다. 원 제목은 , 즉 겨울여행인데 무슨 영문인지 국내에는 겨울나그네로 번역되었다. 빌헬름 뮐러의 시‘겨울나그네’는 정작 슈베르트의 연가곡으로 유명해졌다.

멜랑콜리한 가사와 슈베르트 특유의 유장함, 그리고 계절이 주는 쓸쓸함까지 녹아 있는 이 연가곡은 바리토노 피셔 디스카우의 음반을 계기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아 왔다. 제럴드 무어의 피아노 반주로 1976년 도이취 그라마폰으로 나온 음반은 디스카우를 전설적인 바리토노로 인정받게 한 불후의 음반이다. 그래서 아직 피셔 디스카우보다 겨울나그네를 더 잘 소화하는 성악가는 없다고 한다.

한 시대 풍미한 청춘의 표상

그러나 국내에 겨울나그네가 유명해진 데에는 1986년 개봉된 란 영화가 한몫 톡톡히 했다. 권위주의 시대, 휘둘린 청춘 남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린 영화는 대중작가 최인호 특유의 감성이 녹아 있던 동아일보 연재소설이 그 바탕. 아직은 젊었던 안성기가 복학생으로, 강석우와 이미숙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학하던 당시 청춘들은 영화에 열광했으며 시국상황을 잊고 잠시나마 달콤한 연애를 꿈꾸기도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치 찬란한 주제마저도 잘 버물려진, 순연한 사랑을 담아낸 그런 영화였다.

개봉 당시 겨울나그네는 시대를 반영하는 아이콘으로 일약 부상했고 서울 거리에는 겨울나그네, 보리수라는 다방 제과점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겼다. 사람들의 관심 속에 슈베르트 음악회가 잇달아 열리고 일부 고전음악 애호가들에게 사랑 받았던 등 독일 리이트들이 대중공간에서까지 쉽게 흘러 나왔다. 영화 속에서 첼로를 들고 가던 이미숙이 강석우와 부딪쳤던 연세대 교정과 강석우가 바래다 주고 쓸쓸하게 돌아가던 언덕 위의 하얀 대리석 돌집은 그 시절 청춘들이 한번쯤 찾아보던 명소로 각광받았다.

겨울나그네가 이처럼 화려하게 한 시대를 풍미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감독 곽지균을 빼놓을 수 없겠다. 흔히 시대상황을 들거나 당시 풋사과 같았다는 이미숙, 꽃미남 강석우 등도 한 몫 했다지만 그래도 곽지균의 힘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영화는 곽지균에게 데뷔작이자 출세적이며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이 작품으로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거머쥐었으며 이미숙 역시 청순하면서도 고고한 이미지를 굳히며 톱스타 반열에 올라선다.

한 시대 청춘의 표상이었던 곽지균 감독이 연탄불을 피어 놓고 자살했다. 그의 자살은 겨울나그네를 보고 열광했던 세대들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순수와 영혼을 조율하는 사랑의 세레나데’라고 영화 포스터에 올린 그가 정작 생활고로 인해 저 세상으로 떠났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심정이 된다.

작가주의 감독 설 자리 좁아

실제로 투자방법이 달라지고 흥행에 매몰된 한국 영화계에 곽지균 류의 작가주의 감독이 설 자리는 그리 넓지 않다. 와 , 가 증거하듯 한국영화 최고의 르네상스 시대에, 한 시대를 풍미한 영화인이 택한 비극적인 죽음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다.

그는 “자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and the miles before I sleep)”는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구절을 유서에 남겼다고 한다. 시는 힘들고 지친 나머지, 아름답고 아늑한 숲에서 쉬고 싶어도 지켜야 할 약속과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가 지켜야 할 약속은 무엇이고 아직 남아 있는 길은 도대체 무엇일까? 겨울나그네는 이제 길을 떠났고 2010년 봄날 또한 지나갔다.

김동률 KDI 연구위원·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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