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전수전(山戰水戰).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28, 30일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의장 재임 2년간의 국회와 자신에 대해 네 글자로 압축해 표현했다. 그는 29일 18대 국회 전반기 의장의 임기를 마치고 평의원으로 돌아갔다. 그의 재임 기간 여야는 미디어법과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등을 놓고 사사건건 싸웠다. 또 여야의 충돌 과정에서 해머, 전기톱, 소방호스 등이 총동원돼 '최악의 국회'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김 전 의장은 "의장으로서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여당과 야당의 자세 전환을 강력히 촉구했다. 그는 여당에 대해 "18대 총선 결과만을 믿고 수의 힘으로만 밀어붙이려 했다"고 비판하면서 인내와 설득의 자세를 주문했다. 또 야당에 대해선 "대화 정치를 두려워하고 촛불시위에 기대려 했다"면서 야당 강경파도 책임지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난 2년간의 국회를 돌아보면서 고사성어 한마디로 표현해주시지요.
"산전수전을 다 보여준 국회였습니다. '욕속부달'(欲速不達ㆍ일을 서두르면 오히려 망친다)의 교훈도 남겼지요. 저는 그간 '일야구도하'(一夜九渡河ㆍ하룻밤에 같은 강을 9번 건넌다)의 심정으로 일했습니다. 칠흑 같은 밤에 강을 건널 때 눈과 귀를 믿으면 병이 되고 마음을 믿으면 걱정이 없다고 했는데, 마음으로 하는 정치를 해야 합니다."
-의장으로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2008, 2009년 미디어법 갈등 때입니다. 2008년 말 야당이 국회를 점거하면서 국회가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당시 직권상정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권으로부터 평생 들을 욕을 다 들었지요. 다른 방법이 없어 2009년 7월 직권상정을 하는 과정에서는 야당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18대 전반기 국회는 '최악의 여야 대치 풍경'을 보여줬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데, 의장으로서 책임을 느끼지 않는지요.
"당시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요. 입법부 수장으로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국민에게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여야 대치 과정에서 의장의 목소리는 안 들리고 강경파의 목소리만 커지는 구조는 개혁돼야 합니다. 강경파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원천 봉쇄라고 외쳤던 강경파들도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았을 때는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국회사무처 등이 국회폭력에 연루된 의원과 당직자들을 고소∙고발한 사건을 취하해달라는 야당 지도부의 요구를 끝까지 들어주지 않은 것도 폭력이 재발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김 의장은 강경파 의원들이 제출한 의원직 사퇴서를 수리하지 않았는데요.
"의원들이 언론에 한 줄 나려고 쇼를 하는 건데 의장이 맞장구를 치면 되나요. 국민이 뽑은 의원의 사퇴서를 국회의장이 수리하는 것은 헌법 정신에도 맞지 않습니다. 사퇴서를 선거관리위원회에 내도록 하고 선관위가 이를 수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의장으로서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행정부나 여야 정당의 마음대로 국회가 운영되는 게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 국회 위상을 세운 겁니다. 예산정책처와 입법조사처 등 국회 지원기관들을 발전시킨 것에도 보람을 느낍니다."
-직권상정 때문에 유달리 곤욕을 치른 의장이었습니다. 다수결과 소수 의견 존중 원칙이 지켜지는 국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회법을 어떻게 개정해야 할까요.
"선진국엔 직권상정 제도가 거의 없어요. 우리나라에선 심지어 야당들도 직권상정 제도를 악용하려 합니다. 적당히 타협했다는 비판을 받느니 양보하지 않고 '직권상정 때문에 패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지요.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가로 막는 직권상정 제도는 없애야 합니다. 법안을 제출한 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 상정되도록 하고, 심도 있는 토론을 거쳐 표결하도록 제도를 바꿔야 합니다. 한 안건에 대해 몇 시간 이상 토론해야 한다는 규정을 국회법에 추가하고 법안 별로 상임위 소위를 구성해 토론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은 법안 수십 건을 놓고 상임위 전체회의에서 대체토론을 한 번 하면 끝이지요. 우리 국회는 껍데기만 선진 국회입니다. 또 국회법을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손해를 본다는 의식이 정립돼야 합니다. 회의장에 언론사 카메라만 등장하면 의원들이 쇼를 하는 점도 문제입니다. 영국 BBC 방송에선 '방송이 없으면 한국 국회는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일침을 놓기도 했습니다."
-후진적인 국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여당과 야당이 각각 어떤 점을 고쳐야 할까요.
"10년 만에 진보에서 보수로 정권이 교체된데다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여야의 승패 격차가 어느 때보다 컸습니다. 여야 정치권은 초유의 현상을 숙고하지 못했습니다. 패배감에 젖은 야당은 대화의 정치를 두려워하면서 원군을 광화문과 청계천의 촛불시위대 속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여당은 선거 결과만 과신하고 다수결 원칙과 수의 논리로만 밀어붙이려 했습니다. 미디어법의 경우 여당은 처음에 국민은커녕 여당 의원들도 법 내용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직권상정을 추진하겠다고 했지요."
-의장 재임 중 여권 지도부로부터 모종의 압박을 받은 일도 있었나요.
"정권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국회 권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서로 생각이 다를 땐 누구의 지시나 강제가 아닌, 양심과 판단에 따랐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가끔 했나요.
"가끔 씩과 드문 것의 중간 정도 횟수로 통화를 했습니다. 주로 대통령이나 제가 외국에 다녀 왔을 때 안부를 묻는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국내 현안에 대해서도 한두 마디 하고 그랬지요."
-6∙2 지방선거 후 우리 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리라고 전망합니까.
"우선 개헌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8대 국회 전반기가 개헌을 위해 좋은 시기였는데 여야의 이해 관계가 작용하고 일부 정치지도자들이 당리당략적으로 접근하는 바람에 때를 놓쳤어요. 하반기 국회는 개헌특위를 조속히 만들어 개헌 국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여야 모두 지난 2년간 국회가 민생과 정치의 중심적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정치문화를 바꾸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이에 따라 국회 운영의 민주화와 선진화가 관심사로 떠오를 것입니다. 세 번째로 당론 구속의 완화와 당론 결정의 민주화 방안 등이 논의될 것입니다."
-바람직한 권력구조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다시 불행한 대통령이 나오지 않게 하려면 5년 단임제를 바꾸는 게 바람직합니다. 미국식 대통령제나 독일식 내각제, 프랑스식 또는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 등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
-역대 의장들은 퇴임과 동시에 정계은퇴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김 의장은 '젊은 의장'이기에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당 대표나 대권에 도전할 것이라는 얘기도 있는데요.
"당에 복귀하면 백의종군을 하면서 한나라당이 잘 되는 일은 작은 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당 대표는) 내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는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대선까지는 아직 새까맣게 멀었지요. 역대 의장들은 '국회의원은 마지막'이라고 선언했지만 저는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친이계와 친박계가 갈등하는 한나라당으로 복귀하게 되는데, 두 계파 중에 누구 잘못이 크다고 생각하는지요.
"두 계파 모두 윗사람 눈치를 너무 많이 보고 있어요."
-이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눈치를 많이 보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의원들이 진지하게 정책 토론에 참여하기 보다는 계파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게 문제입니다. 계파가 공천권을 나눠 갖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줄서기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앞으로 한나라당 정권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계보 정치를 타파하고 소통이 부족한 것을 개선해야 합니다. 이 대통령은 그렇지 않지만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끼리만 주로 만나는 것을 지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리도 나눠가져야 합니다."
-천안함 사태가 자칫 남북간의 정면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시각도 있는데요.
"북한에 대해서는 국제공조를 통해 포위망을 압축해야 합니다. 특히 자위권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절대 양보하지 말고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해 재발방지 약속과 책임자 처벌 등의 가시적 조치를 얻어내도록 해야 합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선 우리가 강해져야 합니다. "
-의장 재임 기간 전국을 순방한 내용을 중심으로 등 두 권의 책을 감성적 문체로 써서 화제를 뿌렸는데요.
"저는 어릴 때 내성적이었습니다. 집안에서 보이는 글이란 글은 다 읽었습니다. 누나와 형의 책도 다 읽고 외웠고, 그 과정에서 글 쓰기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최근 책을 부드럽게 쓴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2008년 말 야당이 의장공관을 점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며칠간 호텔을 찾았습니다. 한강변이 보이는 한 호텔 앞마당 나뭇가지에 있는 얼음이 녹아 물방울이 돼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저게 내 신세, 국회 상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문득 정치가 메마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드러운 문체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 약력
▲1947년 경남 고성 출생
▲경남고, 서울대 외교학과, 경남대 정치학박사
▲동아일보 기자
▲국무총리 정무비서관
▲14~18대 국회의원(부산 영도구, 5선)
▲한나라당 사무총장, 원내대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 부위원장
▲국회의장
인터뷰=김광덕 정치부장 kdkim@hk.co.kr
정리=최문선 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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