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 대신 지게 메고 최전방 누빈 'A_Frame Army'를 아십니까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짐을 나르는 지게에 불과했어요."
진복균(74)씨는 60년 전 6ㆍ25전쟁을 떠올리며 나직이 읊조렸다. 군번도, 군복도, 이름도 없이 무정한 전쟁터의 한복판으로 내동댕이쳐졌던 기억 때문이다.
1951년 4월 어느 날 오후. 당시 15세였던 진씨는 강원 원주시의 피난민 수용소 부근 실개천에서 또래 아이 3명과 놀고 있었다. 멀리서 미군 트럭의 엔진 소리가 들리자 아이들은 먹잇감을 발견한 듯 뛰어가며 능숙한 말투로 "?꼬레뜨(초콜릿)"를 외쳤다. 트럭이 멈췄고 무장한 미군 1명과 유엔경찰 1명이 다가왔다. 이들은 서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호통을 치며 아이들을 모두 트럭에 태웠다. 트럭은 비포장 도로를 한 시간쯤 달리더니 또 다른 수용소에 도착했다.
"잔뜩 겁에 질려 트럭에서 내리는데 사방에는 온통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곳곳에서 무장한 군인들이 노려보고 있었어요. '도망갈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마라. 그랬다간 바로 총살'이라고 겁 주던 통역관의 딱딱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요."
둘러보니 끌려온 사람이 얼추 200명은 넘었다. "징집 연령이 훨씬 지난 노인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나처럼 강제로 붙잡혀 온 사람들이었어요. 나보다 어린 애들도 서너 명 있었고요. 일부는 소집영장을 받았다는데 이들은 대개 주인 대신 나온 머슴이거나 아버지 형 대신 나온 젊은이들이었어요."
그날 밤 미군 병사들이 천막 안으로 들이닥치더니 고함을 치며 20명씩 나눠 트럭에 태웠다. 한참을 달린 뒤 차가 멈춰 섰는데 홍천군 가리산이라고 했다. 사방에 미군과 중공군의 시체가 뒤엉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통역관은 빨리 미군 시체를 치우라고 아우성이었다.
진씨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친다. "구역질 나는 구더기 떼 속에서 꼬박 사흘간 미군 시체를 트럭에 실었어요. 하도 목이 말라 미군 감독관이 안 보는 사이 냇가에 엎드려 허겁지겁 물을 들이키는데 위쪽에 시체가 썩어 문드러져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지요. 하지만 별 수 있나요. 앞뒤 가릴 것 없이 살기 위해 무조건 마실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기막힌 운명이 시작됐다. 아무런 설명도 없고,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오로지 자신을 감시하는 미군이 무서워 시키는 대로 짐을 날라야 했다.
당시 미군과 유엔군은 계속된 전투로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보급품 수송에 병력을 투입할 형편이 아니었다. 한국의 험준한 산악 지형도 낯설었다. 결국 산등성이 고지까지 탄약과 식량을 나르고 시체와 부상자를 부대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민간인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이렇게 동원된 사람들을 노무자라고 불렀다.
진씨를 징발한 것은 미 2사단이었다. 부대를 따라 인제군 일대를 옮겨 다녔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고지를 뺏고 뺏기는 최전방에서 앞사람 등만 쳐다보고 거친 산길을 오르내렸다. 밤에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허리에 줄을 매고 5m 간격으로 늘어서서 올라갔다. 짐의 무게가 쌀 두서 말은 너끈히 넘는 것 같았다.
"어른들은 박격포탄을 지고 저는 실탄을 날랐지만 기운이 달리다 보니 픽픽 쓰러졌지요. 그때마다 미군들은 말가죽 채찍을 휘두르며 독촉했어요. 일본에서 투입된 일부 미군들은 '곤나야로(이 새끼야)' '빠가야로(바보 녀석)'라며 거친 말을 서슴지 않았고요. 힘들고 무섭고 배고팠지만 말도 잘 안 통하고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으니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할 수 밖에 없었지요."
총도 없이 전쟁터에 들어가다 보니 목숨을 잃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한번은 고지로 올라가는데 통역관이 무전을 받더니 포위됐다며 갑자기 뛰라고 했어요. 아이들은 울면서, 어른들은 같은 고향에서 끌려온 동료들 이름을 부르면서 정신없이 도망쳤지요. 숲 속에서 무자비하게 쏴 대는 적군의 총탄 세례를 뚫고 살아남은 것만도 기적이었어요."
때론 피비린내 나는 전투 현장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보급품을 등에 지고 산에 오르는데 미군 정찰기가 바로 앞 계곡에 신호탄을 쏘더니 이어 전투기 편대가 교대로 폭격을 하며 불바다를 만드는 거예요. 우리는 참호 속에 숨어 고개만 쳐들고 있는데 순식간에 미 2사단과 한국군 8사단이 인민군에게 몰려들더니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칼로 찌르면서 피가 튀기는 육박전이 벌어졌죠."
그렇게 6개월이 지난 51년 10월 육군 장교들이 찾아와 방한복 등 그럴싸한 전투복을 입히더니 "여러분도 군인이나 마찬가지다. 앞으로 6개월만 지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분위기를 잡았다. 노무단(Korean Service Corps)이 창설되면서 정식 부대에 배치된 것이다. 그간 전혀 없었던 월급도 300원씩 나왔다. 이때 비로소 부모에게 군사우편으로 소식을 알릴 수 있었다. "수개월간 아들을 찾지 못한 부모님은 물에 빠져 죽은 줄로만 알았다더군요."
노무단에 배속되면서 그는 인제군 관대리의 한 탄약보급소에 배치됐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고생의 시작이었다. 동해 부둣가에서 하역한 탄약이 트럭에 실려 오면 전방 고지마다 분배하는 일이었는데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탄약의 행렬은 도무지 끝이 없었다. "감독하는 미군들은 항상 '너희 나라를 위해 우리가 와서 죽어 가며 고생을 하고 있다'고 투덜댔어요. 매질을 하기도 했죠. 적군의 포탄에 놀란 미군 병사가 중간에 트럭을 돌려 한참 먼 곳에 탄약을 쏟아 버린 채 내뺀 적도 있어요."
52년 9월 7일 소대장이 귀향명령을 내렸다.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미 노무자로 16개월이나 전쟁터를 누빈 뒤였다. 미군 트럭에 실려 서울의 노무단본부로 인계됐다. 손에 쥔 것은 종군기장과 징용해제통지서, 춘천행 화물열차 무임승차권이 전부였다.
"어린 나이에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었던 대가치고는 너무 소박했지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게 다 이 땅의 현실이고 저의 운명인 것을…."
■ 워싱턴DC 참전기념비에 지게부대 모습도
제임스 밴플리트 전 미 8군 사령관은 6ㆍ25전쟁 당시 인간 지게로 불렸던 노무단 소속 민간인들에 대해 "이름 없는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전쟁의 절반을 치른 전승의 주역이지만 그들의 공로는 묻혀 버렸기 때문이다.
월턴 워커 당시 미8군 사령관은 전투 현장에서 보급 인력이 달리자 한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7월 26일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징발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선포했다. 이에 미군은 주로 징집연령을 넘긴 35세 이상 남성이나 어린이들을 노무자로 징발했다.
51년 7월 14일에는 미 5군단 일반명령 17호에 따라 3개 사단과 2개 여단으로 구성된 총 6만명의 노무단이 공식 편성됐다. 이후 보충대까지 창설되면서 52년 11월에는 부대원이 최고 10만명까지 늘었다.
부대원들은 최악의 상황과 지형 조건에도 연합군에게 끊임없이 탄약과 보급품을 전달해 지게부대(A_Frame Army)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들이 메고 다니던 지게가 영어 알파벳 A와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원칙적으로 근무 기간은 6개월이었지만 실제 이를 지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근무 기간이 군 복무 기간으로 인정되지 않아 징집해제 후에도 다시 군 복무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후 확인된 희생자만도 사망 2,064명, 부상 4,282명, 실종 2,448명에 달한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참전 노무자들의 넋을 기리는 묘역이 별도로 조성돼 있다.
미 워싱턴DC의 6ㆍ25전쟁참전기념공원의 기념비에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과 함께 5명의 한국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들이 바로 노무단이다. 그만큼 외국의 참전용사들에게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다.
67년 한미 양국은 '노무단 유지를 위해 미군부대에서 요청하는 적정 인원을 주한미군에 제공한다'는 내용의 행정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94년 대대급으로 격상되면서 노무단에서 근무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17개 중대, 2,200여명의 근무단 직원들은 공동경비구역(JSA)에서부터 부산의 저장센터까지 한반도 전역에 주둔하고 있는 미 8군과 미군부대를 지원하고 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