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블린 웰치 지음ㆍ한은경 옮김/에코리브르 발행ㆍ527쪽ㆍ3만3,000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다. 이 말이 요즘은 달리 통한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데카르트는 좋아하지 않겠지만, 세태가 그렇다. 쇼핑은 이제 만인의 오락이자 존재 증명이다. 언제부터 그리 됐을까.
영국 역사학자 에블린 웰치는 오늘날과 같은 쇼핑 문화의 뿌리를 르네상스 시대에서 찾아낸다. 대량생산된 물건을 구매하는 요즘과는 다르지만, 그때도 쇼핑은 중요한 사회현상이었다는 것이다. 에서 그는 1400~1600년 이탈리아의 소비자 문화를 다룬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의문에서 출발한다.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쇼핑을 했을까? 어떤 물건을 주로 샀을까? 흥정과 지불은 어떻게 했을까? 물건 값이나 상품 정보는 어떻게 알아냈을까? 귀족들은 직접 쇼핑을 했을까, 아니면 하인에게 시켰을까? 그 시대 여자들도 쇼핑을 즐겼을까? 장사꾼들은 어떤 상술로 손님을 끌었을까?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는 다양한 자료를 동원했다. 도시의 법령과 범죄 기록, 상인의 장부와 귀족 집안의 가계부, 경매와 물가 목록, 예술과 문학작품 등이 그것이다.
책은 4부로 되어 있다. 거리와 장터, 상점 등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차근차근 짚는다. 1부는 쇼핑에 대한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식료품을 포함해 쇼핑이 주로 남자의 몫이었고, 귀족들은 중개인이나 하인을 시켜 물건을 구매했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시장을 돌아다니는 것을 안 좋게 여겼고, 귀족이 직접 쇼핑하는 것은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일로 보았기 때문이다. 갖고 있는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리거나, 자기 물건을 주고 다른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2부는 쇼핑 구역의 형성이 도시 공간에 미친 영향을 다룬다. 주요 성인의 축일에 여러 날씩 정기 시장이 서던 광장과 시끄러운 노점 거리, 고가 사치품 가게를 차례로 살피고, 이들 공간을 관리감독하던 각 도시의 규정을 검토한다.
3부는 경매와 복권 이야기다. 경매는 그 시대 쇼핑의 주요 현장이었다. 경매의 입찰 경쟁은 주기도문을 외우는 시간 짧은 시간 동안 벌어졌다. 복권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당첨되면 상품을 받았다.
르네상스 시대 소비자의 초상은 4부에 나온다. 밀라노 궁정의 안주인이었던 이사벨라 데스테 이야기가 특히 재미있다. 그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원하는 물건을 구매하고 유행을 선도한, 쇼핑의 여왕이었다.
저자가 그려내는 르네상스 시대 소비문화 풍경은 다소 어렴풋하다. 최대한 많은 자료를 동원했지만, 당시 상거래가 기록 없이 대개 말로 이뤄졌기 때문에 구체적 묘사를 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한 탓이다. 하지만 약간의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빈 자리를 채워 넣으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책에 실린 많은 도판이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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