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상가 발터 벤야민을 처음 접했던 때는 1990년대 초였다.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한 고민에 휩싸였던 대학 시절, 벤야민은 묘한 '아우라'로 다가왔다. 나치 점령을 피해 스페인 국경으로 도피하다 자살한 그의 삶부터 그랬다.
당시 국내 번역된 벤야민의 책은 이 유일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저작 중 주요 논문만 추려 한 권으로 묶은 책이었다. 짧은 지식으로 얼마나 그의 사상을 이해했겠냐만, 그는 책 속에 등장하는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처럼 신비롭고 아득했다. 언젠가는 제대로 알고 싶었다. 벤야민의 책은 2000년대 들어서야 차츰 늘어났는데, 그러나 그땐 자본주의의 대안 같은 고민은 걷어치운 지 오래였다.
벤야민이 다시 다가온 것은 친구 때문이었다. 10년 넘게 독일에서 유학 중인 친구가 벤야민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에 가슴이 덜컥했다. 돈도 되지 않을 벤야민 공부를 위해 청춘을 바친 친구는 미련한 짓을 해왔던 것일까.
2007년말부터 벤야민 선집 출간을 시작한 도서출판 길이 최근 선집 4권을 내놨다. 5, 6권이 먼저 나온 터라 이번이 여섯 번째 책이다. 내년 상반기까지 전 10권을 내겠다는데, 벤야민 사상의 전모를 보여주겠다는 포부다. 물론 이런 책은 많이 팔려봐야 몇천 부다. 그렇지만 편집자는 뿌듯해했다. "그의 사상은 앞으로 100년 이상 유효할 겁니다." 새물결 출판사도 몇 년 전부터 전6권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비롯한 벤야민의 책을 내고 있다. 이런 책을 꾸준히 내는 출판사들도 미련한 것일까. 무엇이 이들의 집념을 낳은 것인지, 이번에는 벤야민을 꼭 읽어야 할 것 같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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