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영리한 소녀가 40대처럼 노련하게 연주했다."
연주가 끝난 뒤 대기실로 가던 한국의 신예 바이올리니스트 정상희(21ㆍ빈 국립음대 3년)씨에게 지휘자 막심 쇼스타코비치(72)가 건네는 말이었다. "두 번의 리허설보다 실전에서 더 돋보였다"며 "앙코르를 하지 그랬느냐"고까지 했다.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아들인 그는 1981년 독일 망명 후 유럽, 미국 등지에서 활동해온 유명 지휘자다.
체코의 온천휴양도시 테플리체의 문예회관 콘서트홀에서 27일(현지시간) 오후 7시 열린 제46회 베토벤 국제음악페스티벌 개막 연주회. 정상희씨는 혼신의 카덴차를 끝낸 뒤 끊일 줄 모르는 환호에 거의 탈진 상태였다.
800여명의 관객 앞에서 정씨가 막심 쇼스타코비치의 지휘로 북체코 필하모니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는 초연 당시 '연주 불가'라는 딱지가 붙었을 정도로 현란한 카덴차로 악명높다. 거칠고 강한 음색으로 질주하는 1악장, 유려한 2악장에 이어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격정적으로 대미를 장식하자 객석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브라보!"와 함께 5분여의 갈채가 이어졌다.
이날 정씨는 오케스트라와 객석을 모두 포함,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한국 음악가를 유럽에 소개하는 전문 기획사 쉔부른 클래식매니지먼트에 따르면 동양인, 특히 학생이 유럽 클래식 축제의 개막 연주회에 솔리스트로 서는 일은 극히 드물다.
서울예고 재학 중 오스트리아로 유학, 빈 국립음대에 수석 입학한 정씨는 지난 2월 세계적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피아니스트 마르크 시보와 함께 독일 뉘른베르크 심포니오케스트라의 반주로 베토벤 3중 협주곡을 연주하며 주목받았다. 지난해 11월 프라하 스메타나홀 주최 하이든 서거 200주년 기념 오케스트라 협연 무대에서 하이든의 협주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테플리체는 건강이 나빠진 베토벤(1770~1827)이 휴양을 온 곳으로, '교향곡 7번' 등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이 도시는 베토벤이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괴테를 만난 거리에 기념 동판을 새기고 1965년부터 베토벤 페스티벌을 열기 시작했다. 체코의 대표적 축제로 자리잡은 베토벤 페스티벌은 매년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테플리체를 넘어 호무토프 등 인근 9개 도시의 공연장에서 개최된다.
정씨는 9월 이탈리아 라벨로 국제음악페스티벌에서 다시 미샤 마이스키, 마르코 시보와 함께 같은 곡을 연주해달라는 초청을 받았고, 11월에는 독일에서 뉘른베르크 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한다.
"많은 유학생들이 외롭고 힘든 외국생활 때문에 초심을 잃고 졸업장만 받고 돌아가지요. 좋은 연주자가 되려면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대중 앞에 도전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정씨의 말은 다부졌다.
테플리체(체코)= 글·사진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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