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공영방송에 관한 신화적 믿음 몇 가지. 첫째 역사가 진척될수록 공영방송은 보다 독립적으로 되었다는 것, 둘째 선진국의 공영방송은 정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 셋째 한국의 공영방송이 여느 선진국의 경우처럼 정치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일반론, 혹은 반대로, 선진국과 달리 정치에 종속적이라는 특수론.
이 성급한 믿음들을 흔드는 사례는 어렵지않게 찾을 수 있다. 독립적 규제 기구인 BBC트러스트에 의해 사장이 임명되는 BBC의 경우, 제도적으로는 BBC가 정부로부터 독립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와 BBC 사장은 친화적이지 않을 수 없다는 정치적 해석도 양존하며, 종종 당대 정권과 가까운 유대관계에 있는 인물이 BBC 사장으로 선택되곤 했다.
또한 지금 프랑스의 공영방송 체제는 명시적인 변화 혹은 위기 국면에 있다. 공영방송사의 광고를 제한하고 대통령이 사장을 임명하는 내용 등을 골자로 하는 사르코지 정부의 공영방송 개혁 조치에 따라, 프랑스 공영방송사가 보다 직접적으로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리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편 2009년 기자들의 NGO 조직인 '국경없는 기자들'이 진행한 설문 조사 결과에 의하면, 기자들은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 정부가 방송에 개입하는 정도가 커진 반면 언론의 자유가 축소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우리는 '사장의 퇴임'과 'MBC 장악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한 달여 동안 계속된 MBC 노조 파업 사태 및 현재 예정된 파업 참가 조합원에 대한 징계 문제를 연상하게 된다. 동시에 법, 경영, 정책 등 주로 객관적인 제도 영역과의 마찰로 인해 발생하는 해외의 방송 갈등 사례들과는 구분되는, MBC만의 특수성을 감지한다. 그것은 MBC 사태가 경영진의 (비)도덕성, 방송문화진흥회의 (비)합리성, 그리고 이들에 대한 정치권 태도의 (비)정당성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의 표출이라는 점이다. MBC 노조로부터 '선배'를 비판하고 방송문화진흥회와 정권에 의구심을 표명하는 목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영방송의 '위기'란 너나 할 것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실상 민주사회에서 논쟁과 갈등이란 당연할 뿐 아니라 오히려 매우 중요한 정치과정이다. 그렇다면 공영방송 민주화의 질적 수준은 문제 발생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에 접근하는 사회정치적 태도에서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다. 선진 공영방송 체제에서는 개별적인 정치 사안으로는 공영방송의 근간을 이루는 원리와 가치가 좌지우지될 수 없도록 받쳐주는 제도적, 정책적, 법적 기제와 사회정치적 인식이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BBC에서는 파업이 발생하면 노조 쪽에서는 파업의 합리적인 실행 방식을 모색하고, 중립적인 갈등 조정 조직이 합법적으로 개입하며, 타협을 위한 사측의 노력이 적극적으로 투입된다.
요컨대 균열의 속내를 이해하려는 양심적 지각력, 갈등 지점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도덕적 정치력, 사안을 인정하고 개선하는 문제해결능력이 사회적으로 함께 계발되고 수행될 때, 문제는 비로소 발전의 계기로 활용될 수 있다. 반대로 지금의 MBC 상황처럼, 연발하는 사건들을 개별 방송사의 내적 문제로 축소하며 파국으로 치닫도록 버려둔다면, 이는 배신-희생-방관의 요소들이 배합된 하나의 정치적 비극으로 남게 될 뿐이다.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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