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게 흐르는 용암과 시뻘건 마그마를 가로 지르며 벌이는 운명적인 결투. 아나킨과 오비완 두 제다이가 펼쳐낸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 중의 그 장면, 영화가 개봉된 2005년 이후 지금까지도 전 세계 영화 팬들의 기억 속에 또렷하다. 제다이의 움직임을 따라 윙윙 신비로운 소리를 내며 관객의 눈을 사로잡은 무기, 눈이 부시도록 밝은 레이저 광선검과 함께.
레이저는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가 시작된 1977년보다 무려 17년이나 앞서 탄생했다. 1960년 5월 세상에 첫 선을 보인 레이저는 반 세기가 지난 지금 눈 부시도록 성장했다.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에서까지 위력을 떨칠 만큼 말이다.
눈 깜빡 할 사이보다 빠르게
대구에서 열린 국제육상경기대회 남자 200m 경기. 1위인 미국 라이언 베일리 선수와 2위 자메이카의 마빈 앤더슨 선수의 기록은 단 0.01초 차이였다. 스포츠 기록에 사용되는 고속카메라는 1초에 100∼1,000번은 촬영해야 순위를 가릴 수 있는 것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다.
자연계에는 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 현상도 많다. 화학물질이 합성되고 분해되는 과정이나 세포 안에서 DNA가 움직이는 과정은 대개 펨토(1,000조분의 1)∼아토(10-18)초 만에 이뤄진다. 눈 깜빡 할 사이가 약 10분의 1초니까 이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빠르다. 이렇게 빠른 현상을 관찰하려면 일반적인 영상기술만으론 어림도 없다. 레이저가 필요하다.
태양이나 형광등의 빛은 밝기가 연속적이지만 레이저는 깜빡깜빡하게 불연속적으로 만들 수 있다. 켜졌다 꺼지는데 걸리는 시간(펄스 폭)도 아주 짧게 줄일 수 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깜빡이게 한다는 얘기다. 과학이 구현한 가장 짧은 레이저 펄스 폭은 현재 3.5 펨토초. 레이저에 추가로 물리적 조작을 가하면 100아토초 정도까지도 가능하다.
이 같은 펨토초 레이저를 써서 최근 과학자들은 분자가 움직이는 찰나의 모습을 촬영해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만들기도 했다. 미래의 레이저 역시 결국 펄스 폭을 점점 더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해갈 것이다.
루비에서 사파이어까지
펄스 폭 말고 세기(출력)와 파장도 레이저 기술의 발달을 이끌어온 중요 요소다. 1초에 1줄(J)의 에너지를 내는 레이저는 출력이 1와트(W)다. 초기 레이저의 출력은 킬로와트(1,000W) 수준이었으나 지금은 테라(1조)∼페타(1,000조)와트까지 세졌다.
광주과학기술원 고등광기술연구소에서는 국내 최고 수준인 100테라와트짜리 고출력 레이저를 가동하고 있다. 고출력 레이저빔을 특정 물질에 쏘면 원자 속에 있는 전자나 양성자를 매우 빠르게 가속시킬 수 있다. 태양이나 형광등 빛은 멀리 보내면 옆으로 퍼지는데 비해 레이저는 쭉 직진한다. 이런 직진성 덕분에 레이저는 강한 빛을 좁은 공간에 집중적으로 보낼 수 있다.
정태문 고등광기술연구소 레이저연구실장은 "현미경으로도 관찰할 수 없는 물질 내부의 보이지 않는 미세한 구조를 파악하거나 생체 내부에 있는 암 덩어리를 골라 파괴하는데 바로 고출력 레이저가 활용된다"며 "100테라와트보다 출력이 더 높은 레이저도 최근 거의 완성한 단계"라고 말했다.
고등광기술연구소의 100테라와트 레이저는 매질이 티타늄과 사파이어다. 티타늄 원소에 사파이어를 첨가한 고체물질 안에서 전자의 에너지가 변하면서 레이저가 생성된다. 1960년 처음 만들어진 레이저의 매질은 루비였다.
매질은 레이저가 작동하는 파장영역을 결정하고 다양한 특성을 띠게 한다. 과학자들은 고체뿐 아니라 기체나 반도체 등 여러 물질을 매질로 사용해 각각 다른 파장의 레이저를 구현해왔고, 이는 레이저의 산업적 활용도를 크게 향상시켰다. 예를 들어 DVD나 CD플레이어, 광통신에 쓰이는 레이저는 각각 파장이 가시광선과 적외선 영역인 반도체와 광섬유가 매질이다. 미세한 전자기기 부품을 생산하는 공정에는 파장이 짧은 자외선 레이저도 쓰인다.
광선검이 부딪칠 수 없는 까닭
이렇게 발달했어도 아직 스타워즈의 레이저 광선검은 현실에 없다.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물리적으로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입자들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서로 밀쳐내기 때문에 동시에 한 위치에 있을 수 없는 '페르미온'. 대표적인 페르미온이 전자다. 반대로 시공간적으로 겹쳐질 수 있는 입자도 있다. 이는 '보존'이라 불린다. 광자(빛)가 바로 보존이다.
아나킨과 오비완의 결투에서 두 광선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힌다. 하지만 두 광선검이 동시에 한 위치에서 만나면 부딪히는 게 아니라 겹쳐져야 한다. 손전등 2개를 동시에 한 곳에 비추면 두 빛이 겹쳐지면서 세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광선검으로 칼싸움을 한다는 자체가 상상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광자가 페르미온이 아니라 보존이기 때문이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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