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이씨 문중의 유사(有司ㆍ종친회 사무를 맡아보는 직무)로 있던 A(73)씨는 종친회 돈 9억6,000여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1995년 11월 부산지법에 기소됐다. 전국 법원의 영구미제(未濟)사건 중 현재 가장 오래된 이 사건은 피고인이 달아나는 바람에 14년 넘게 첫 재판도 열지 못했다. 6개월 뒤면 재판시효(15년)도 완성돼 영원히 처벌 할 수 없게 된다.
# B씨는 수입금지 대상인 성인용품의 독점수입판매권을 갖고 있는 것처럼 꾸며 대리점을 모집한 뒤 로열티 명목으로 1억5,000여만원을 가로챈 혐의로 97년 6월 서울중앙지법에 기소됐다. 하지만 이 사건도 B씨의 소재가 확인되지 않아 '잠자는 사건'이 돼 버렸다.
피고인의 행방이 묘연해 재판이 중단된 영구미제사건이 해마다 크게 늘어가고 있다. 이 중에는 재판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사건도 적지 않아 자칫 죄를 짓고도 벌을 피해가는 경우가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법원이 구체적인 통계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이미 재판시효가 완성돼 면소 판결을 받은 사례도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25일 대법원에 따르면 올 4월말 현재 전국 법원에 계류 중인 영구미제사건은 271건으로, 2006년 말(106건)에 비해 3년여 만에 2.5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영구미제사건은 궐석재판으로 진행할 수 없는 사형, 무기 또는 장기 10년 이상 징역 또는 금고형에 해당하는 사건 가운데 구속영장이 2회 이상 발부되고 기소 후 1년이 지나도록 피고인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재판 진행이 어려운 것을 말한다. 민ㆍ형사사건 중 재판 진행이 2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는 일반 장기미제사건과 구분된다.
소재불명 피고인의 대다수는 A씨처럼 처벌이 두려워 도망간 사람들로,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매년 도주하는 피고인은 늘어나는 반면, 잡히는 경우는 극소수여서 영구미제사건은 해마다 쌓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지명수배된 피고인이 붙잡히는 것은 우연히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07년 12월말 재판시효가 종전 15년에서 25년으로 늘어남에 따라 앞으로 영구미제사건 수는 급증할 전망이다.
법원과 검찰은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고 있다. 서울지역 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법원이 불구속 재판을 원칙으로 삼고, 기소 전 구속영장 발부를 까다롭게 하면서 영구미제사건이 늘었다"고 책임을 돌렸다. 이에 대해 법원 관계자는 "불구속 재판과 영구미제사건 증가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 도리어 영장이 기각된 피고인들이 성실히 재판에 참석한다"고 반박했다. 그는 "법원이 도망간 피고인에 대해 영장을 발부하면 집행 책임은 검찰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면 검찰은 경찰에 집행을 위임하고, 인력부족에 시달리는 경찰은 일일이 검거에 나서기보다는 도주 피고인들이 그물망에 걸리기만 기다리는 형편이다.
하지만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보다, 도주 피고인을 늦기 전에 재판에 회부할 수 있도록 적극 검거하는 방안을 머리를 맞대고 찾아야 한다고 법조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한 원로 변호사는 "정의(正義)의 지연은 불의(不義)"라며 "상대방 책임으로 돌린 채 새로운 범죄자 처벌에 신경 쓰는 사이에 도망 피고인들은 방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로또식 경찰 불심검문에 기댈 것이 아니라, 피고인을 붙잡은 경찰관에게 인센티브를 줘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거나, 각급 법원과 검찰에서 선발된 인원으로 전담부를 만들어 검거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권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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