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천안함 침몰 사태는 1953년 한국전쟁 종료 이후 끊임없이 되풀이 됐던 남북간 군사적 긴장 상황의 복사판이다. 북한의 무력 도발과 테러 공작이 불거질 때마다 한반도 정세는 급격히 요동쳤고, 남북관계는 상당 기간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종전 이후 북한의 무력 행사로 인한 첫 인명 피해는 1961년 8월25일 발생했다.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북한군 정찰부대는 우리군 초소를 습격해 1명 사망, 4명 부상이라는 결과를 남기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이처럼 냉전체제가 엄존했던 60년대까지 남북은 정치적 선전과 무한 대결만을 일삼았다. 특히 북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기도(1월)ㆍ북한의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1월)ㆍ동해안 무장공비 침투(11월)사건 등이 꼬리를 물었던 68년에는 남북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자 남북은 국제사회의 '화해ㆍ협력' 흐름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분단 후 첫 당국간 만남인 남북적십자회담(71년) 통일과 관련한 최초의 합의서인 7ㆍ4 남북 공동성명(74년) 등을 이끌어내며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이어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74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76년) 등이 터지면서 남북은 다시 대결 구도로 되돌아갔다. 이 때까지만 해도 북한은 자신들의 소행으로 밝혀진 사건에 대해 최소한 사후에 인정하는 자세를 보였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청와대 침투 사건에 대해서는 사건 발생 4년 후에 북한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유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주석은 또 도끼만행 사건에 대해서는 사흘 뒤에 유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북한은 발뺌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천안함 침몰처럼 무력 도발을 자행하고 부인으로 일관하는 북한의 패턴은 이 시기에 자리잡은 것이다. 83년 버마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과 87년 KAL기 폭탄 테러 사건이 대표적이다. 북한은 "터무니 없는 망동"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무관함을 극구 역설했다.
이 때부터 북한이 '테러와 평화공세'라는 상반된 정책을 병행 추진했다. 북한은 아웅산 테러를 일으키기 불과 하루 전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남북한과 미국이 3자회담을 갖자는 미국의 제의를 전격 수용했다.
천안함 사태도 북한이 신년 공동사설 등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피력해온 가운데 터졌다. 한 대북 전문가는 "대남 강경 노선 탈피를 둘러싼 북한 내부의 노선 갈등으로 인해 대화와 테러가 공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대북 포용 정책을 견지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서 발생한 두 차례의 해상 교전이 이 같은 사례다.
우리 정부의 대응은 서서히 국제공조를 통한 북한 고립 전략으로 옮겨 갔다. 전두환 정부는 군사정권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맞대응을 최대한 자제했다. 대신 미국과 일본 등을 활용하는 외교적 수단을 택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으로 대응하던 과거 방식과는 다른 전략이었다. 정부 관계자는 "체제 우월성에 대한 자신감이 밑바탕이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내의 결실은 곧 최초의 이산가족 고향 방문 등 남북대화 활성화,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는 대북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 등으로 나타났다. 현재 정부가 천안함 사태 해결을 위해 유엔 안보리 회부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도 외교적 해법의 파급 효과를 톡톡히 체득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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