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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18> 문제적 개인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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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릴라 이윤택의 To be or Not to be] <18> 문제적 개인의 길

입력
2010.05.2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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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기자 시험에 응시할 생각을 했는가?"

"기자 모집 공고에 4년제 대학 졸업 및 동등 학력(學力) 소지자라 되어 있었습니다."

"자네는 4년제 대학 졸업자와 동등한 학력(學歷)이 없지 않는가?"

"저는 4년제 대학 졸업자와 동등한 학력(學力)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화는 1979년 초 여름 부산일보 기자 시험 면접 고사장에서 제기된 문제입니다. 당시 부산일보 사장은 교육학자 출신인 왕학수 선생이셨고, 면접 당사자는 바로 저입니다. 신문사는 기자 채용 공고에서 '학력(學歷)'을 '학력(學力)'이라고 잘못 조판된 활자를 내 보낸 것이고, 저는 스스로 4년제 졸업자와 동등한 학력(學力)이 있다고 판단하여 응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신문사가 원했던 것은 학력(學力)이 아니라 학력(學歷)이었던 것이지요.

난감해진 사장님은 동석한 상무님께 조언을 구합니다.

"이 친구는 2년제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했으니까,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기자와 동등한 대우를 해 줄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기자직인 3급 직원 대우를 해 줄 수는 없고, 사무직이나 공무직 4급 직원 대우로 채용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기자 시험을 쳤는데 사무직이나 공무직 급수를 줄 수는 없지요. 기자직에 4급 직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모욕적인 기분에 휩싸여 대화 중간에 그만 벌떡 일어서 버립니다.

"제가 잘못 안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신문사 건물을 나서면서 저는 허허롭게 웃었습니다. 필기시험에 합격하고서도 학력(學歷)이 모자라서 기자가 될 수 없다면 한국사회는 학력(學歷)으로 나뉘어진 계급사회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인텔리사회에서 버려진 외톨이 주변인이고, 이제 주변인의 입장에서 이 불평등한 세계를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루카치가 말한 '문제적 개인'의 길을 이제 내가 걸어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범속한 세계 속에 잠수 탈 것인가?

내 꿈은 원래 고등학교 국어교사이거나 신문기자나 방송국 프로듀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망대학과 장래 희망란을 적을 때 그렇게 써 넣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자네 꿈은 너무 소박하군. 좀 더 크고 높은 포부를 펼쳐보지 그래" 하셨지요. 그러나 저는 세상에 대해 무슨 뜻을 품지 않았습니다.

"저는 나이 드신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외동아들입니다. 가능한 빨리 대학을 졸업하고 안정된 직장을 얻고 싶습니다. 결혼도 빨리 하고 아이들도 많이 낳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 소박한 희망은 국립대학 입시에 낙방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립대학에 다닐 집안 형편이었다면 대학에 다닐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 희망을 망친 장본인은 제 자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대학입시에 떨어지랴 자신을 과신했던 교만한 성격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교만함의 대가는 생각보다 가혹했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룸펜 생활, 하사관학교, 도서 외판원, 부산우체국 행정서기보, 한일합섬 염색기사, 한전 서무과 직원 등을 전전하며 철저하게 삶의 외곽을 떠돌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거쳤던 삶 그 자체는 오히려 싱싱하고 낙천적인 일상이었습니다. 제가 거쳐 가는 곳 마다 같이 살자고 유혹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하사관학교를 졸업할 때는 직업 군인 제의를 받았고, 충무 한전 영업소에 근무할 때는 맞선을 보러 온 처녀와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계약 담당이었을 때는 부패의 유혹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꿈꾸던 삶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어야 했고, 기자나 프로듀서여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다시 연극을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결국 범속한 일상을 떠나 제가 꿈꾸던 길을 가야 하는 문제적 개인이었습니다.

저는 그 첫 실행으로 방송통신대학 초등교육과에 등록하고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제1회 방송문학상 시 부문에서 당선되었을 때, 황동규 선생이 심사를 맡으셨고 이성복시인이 예심을 맡았다고 합니다. 당시 이성복형은 을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대학원을 다니면서 방송통신대학 기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저는 충무 한전영업소 시절 이성복 시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방송대학신문 창간 1주년 기념시를 써 보내라고 전화를 걸어온 것입니다. 저는 짐짓 "저는 행사시 같은 것은 쓰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저도 시를 쓰는 서울대 불문과 대학원생 이성복입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뒤늦게서야 잡지를 통해 그가 당대의 촉망 받는 시인이라는 사실?알았습니다.

시인 이성복의 전화는 제게 참을 수 없는 상상력의 공복감을 자극했습니다. 이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 내가 꿈꾸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고향에 돌아와 부산일보사 기자 시험에 응시한 것입니다.

저는 신문사 입사 면접 고사장에서 중도에 나와 버렸기 때문에 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이제 학력을 따지지 않는다는 한국일보 기자 시험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더랬지요. 80년대 한국일보 기자 시험에는 학력 제한이 없다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 한국일보에서 기자 시험 공고가 날 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면접 고사장에서 저를 그렇게 모멸감에 휩싸이게 해 놓고는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을 올려 놓는 게 아닙니까. 당시 교육학자 출신이셨던 사장님과 상무님의 결단으로 저는 부산일보 사상 최초로 4년제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공채 기자가 됩니다. 입사해 보니까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입사한 기자는 13년 만에 두 번째였습니다. 13년 전에 입사했던 기자는 특별 채용 형식이었고, 공개채용을 거친 기자는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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